▲렉 휘태커, <개인의 죽음>생각의나무
원형감옥 전체는 그 자체가 일반 대중을 위한 극장 같은 광경이기 때문에, 대중의 일부가 이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벤담은 감옥 공개의 징계 효과를 굳게 믿은 사람이었다. ) 감시관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본다.’ 그는 또한 부재하는 존재이며, 죄수는 오로지 그의 시선 안에만 있게 된다. ( 렉 휘태커 저, 이명균 외 역, <개인의 죽음> (생각의나무) 중에서 )
홍성욱 교수는 20세기의 전자 파놉티콘 사회에서는 '스펙터클(보는 것)'과 '감시(보여지는 것)' 사이의 경계가 더 이상 없다고 설명한다. 즉, 20세기 이전까지 이른바 '빅 브라더'로 상징되었던 감시의 중앙 집권화가 주변으로 확대돼, 중앙의 감시 능력을 주변에서 나누어 가지면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감시 기능을 국가 기관에서 일괄 관리했다면, 이제는 시민 누구나 감시자가 되어 감시자와 피 감시자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중앙의 감시 능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까지 감시 행위에 '동원' 되고 있는 측면이 크다.
감시 콘텐츠를 양산하는 인터넷
감시자가 곧 피 감시자가 된 것은 콘텐츠 생산자와 콘텐츠 소비자의 경계가 사라진 인터넷 문화와도 같다. '시민 기자'라는 말이 생긴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감시 행위가 곧 콘텐츠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시가 만든 콘텐츠는 다른 종류보다 주목할 만한 스펙터클로서의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스캔들이 옛날보다 부쩍 많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횟수나 빈도가 전에 비해 병적으로 증가한 것이 아니라, 스캔들이 '감시' 콘텐츠로 재생산될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이고 실제로 현실이 그것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감시당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역시, 무심코 타인을 감시하고 있으며 일상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감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개인적인 목적으로 촬영해 이를 개방 매체에 공개했을 뿐인데 이것이 자칫 감시 콘텐츠로 변질되었다면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심코 올린 내용이 감시 콘텐츠가 되어, 타인의 주목을 받고, 자칫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을 정보 공개 이전에 먼저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일종의 차선이며 편법이다.
앞으로 생산하는 신형 휴대전화에는 촬영시 "찰칵" 소리를 내도록 관련 법규를 바꾼다고 해서 감시 사회에서 달라질 건 전혀 없다.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터넷에도 감시 콘텐츠가 부각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네티즌으로서의 개인이 정보 생산자가 된 것은 바람직한 시대의 변화이지만, 그들이 감시 콘텐츠의 주 생산자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불합리하게도 악이었던 감시 행위가 필요악이 돼버렸고, 우리(네티즌)가 그 필요악의 책임과 역할을 떠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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