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의 흉상 혹은 두 명의 수녀Dali
많은 윈도우를 띄우고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명과 동시에 메신저를 하고 있는 네티즌은 전경과 배경을 수시로 바꾸게 된다. 하지만 수많은 윈도우가 떠 있어도 전경은 항상 하나일 뿐이다. 어떤 메신저에는 특정 상대방이 접속해도 접속중인 내 상태가 비접속 상태인 것처럼 표시되어, 나와의 대화 접근 통로를 아예 막아버리는 기능이 있고, 이와는 거꾸로 이런 방식으로 나를 차단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검색할 수 있는 방법도 생겼다. 이른바 ‘왕따 확인 프로그램’이다.
누군가를 내 대화 상대에서 영원히 차단해 버렸다면, 그가 내게 전경으로 떠오르는 것을 강제적으로 막아 버렸다는 말이고, 이미 그는 내게 의미 없는 배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게슈탈트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미해결된 과제로서의 배경이고, 잠재적 전경인데, 과연 전경으로 떠오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배경으로만 남아있을 수 있을까.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전경과 배경을 이해하고 나서 이를 확장해 보면, 게슈탈트 심리학의 선언문과도 같은 문구,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에 이른다. 만일 우리가 어떤 장면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경우 그것은 개별 이미지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총체적인 장면으로 인지한다는 말이다.
지각 대상들은 ‘큰 단위’ 또는 ‘전체성’ (Ganzheit) 이다. ( 김경희, <게슈탈트 심리학>, 21쪽 )
멜로디는 C장조에서 A장조가 될 때에도 그대로 그 멜로디인 것이다. 멜로디는 개개의 음의 합보다 더 많고 새로운 것이다. ( 김경희, <게슈탈트 심리학>, 52쪽 )
브렌타노는 게슈탈트를 전체적으로 지각하는 요인 중 ‘지향성’에 관심을 가졌다. 각각의 게슈탈트는 서로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총체적(전체적)으로 인식돼야 올바른 지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 이미지의 단순한 총합으로 봐서는 안 될 이유가 또 있다. 인간의 욕구 상승 과정을 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자존심, 자아실현 단계로 설명했던 매슬로우는 ‘음식을 원하는 것은 스미스이지 스미스의 위가 아니다.’ 라는 재밌는 비유를 들며 ‘통찰’로서의 지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탤런트 최성국의 합성 사진이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동일한 자세의 최성국이 갖가지 배경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물은 셀프’ 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방송국을 배경으로 최성국이 서 있다고 한다면, 이 사진은 ‘물은 셀프’ + ‘방송국’ + ‘최성국’ 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물은 셀프’ 라는 패러디의 맥락을 알고 있는 디시폐인과, 최성국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검색엔진, 디렉토리, 메일, 카페, 블로그, 지식검색, 뉴스 등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고 있는 모든 서비스를 합친 것을 ‘포털 사이트’ 라고 정의하는 게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각되는 각 대상들과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말이다. 생활은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 딜타이의 말처럼 말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이 구조주의 이론과 자주 관련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때문이다.
우리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의 파란(녹색)불을 보고, ‘파랗다’ 라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가도 된다’ 혹은 ‘빨간불이 아님, 정지하지 않아도 됨’ 이라고 인식한다. 바쁜 출근길에 계속 빨간 신호에 걸려서 짜증났던 증권사 직원이 주식 전광판이 온통 빨갛게 점등되는 걸 보고 기분이 좋아진다. 빨간 것이 빨간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결국 관계의 문제이고 맥락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이다.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환경심리학에 응용했다.
“어떤 겨울 저녁,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걸어서 한 남자가 어떤 주막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 길과 도로표지가 전부 눈에 묻혀버린 벌판을 여러 시간 동안 달리고 난 뒤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문으로 나온 주인은 그를 보고 놀라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한 방향을 가리켰고 주인은 놀라며 말했다. ‘당신이 콘스탄츠 호수를 건너왔다는 말인가요?’ 이 말에 그 사람은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그의 앞에 쓰러졌다.” ( 김경희, <게슈탈트 심리학>, 14쪽 )
코프카의 용어를 빌면, 여기에서 호수는 지리적 환경이고, 벌판은 행동적 환경이다. 행동적 환경은 맥락에 따른 차이, 관계에 의한 차이로, 해골에 고인 물을 맛있게 마셨다는 원효 대사의 일화와도 동일하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차이’와 ‘관계’와 ‘맥락’의 이론이고, ‘통찰’의 학문이다. 웹을 탐험하고 어떤 사이트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될 게슈탈트가 과연 어떤 관계속에서 내게 ‘전경’으로 떠오르는지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