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 <유혹에 대하여>백의
“놀이를 중단하는 것은 놀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는 자유가 아니다. 놀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의무의 의례적인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놀이의 유일한 원칙은 규칙을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법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 <유혹에 대하여>, 169쪽 )
놀이로서의 스포츠, 놀이로서의 도박, 놀이로서의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다.‘놀이 규칙을 선택하고 그 체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일상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것이 바로 놀이의 목적이며, 이런 해방감을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놀이에 몰두한다.
놀이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규칙에 복종할 수도 없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으며 규칙은 일정한 기호를 활용한다. 인터넷 대화방이나 메신저에서의 대화 행위는 일상적 삶과 놀이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일상생활과 동일한 어법이 아닌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른 기호를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다면‘놀이’가 시작된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하오’체를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이른바 ‘필수요소’라고 불리는 규칙과 기호를 따르지 않으면 사진 합성 놀이에 참여할 수 없다. 기호는 모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놀이에 참여하는 성원들은 이 의미를‘동일하게’가 아닌‘비슷하게’ 공유한다.
기호의 빗장이 의미의 습관적인 부유선 아래로 내려올 때는 의미 과다의 즐거움이 있다.’ ( <시뮬라시옹>, 67쪽 )
기호의 습관적인 부유선이란 기호가 환기하는 일반적인 의미, 서로 비슷비슷하게 공유하는 생각들이 거의 일치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기호를 본 사람들이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행위를 한다면 이 ‘습관적인 부유선’에 기호의 빗장이 걸려있는 셈이고, 만일 정확히 일치한다면 기호는 더 이상 기호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소멸한다.
사물 자체가 되는 것이며, 이런 경우에는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놀이가 지속적인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기호의 습관적인 부유선을 얼마나 오르내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위의 말은 ‘기호의 빗장이 의미의 습관적인 부유선 위로 올라갈 때는 의미 결여의 신비함이 있다’라고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일상성, 현실로서의 놀이 문화
일상성이라고 하는 건 반복 속에서의 차이다. ( <소비의 사회>, 170쪽 )
놀이는 마치 일상생활처럼 순환적이며 반복적이다. 일상과 놀이를 구분하는 것은 ‘법칙’을 따르느냐, ‘규칙’을 따르느냐 하는 문제일 것일 뿐이다. 새로운 놀이 문화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사실 놀이의 기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문학에서의‘낯설게하기’처럼 다만 그 기법만이 유행에 따라 덧입혀지는 것이다.
일상성은 놀이의 기본 속성이다. 일상성이라고 하는 건 반복 속에서의 차이다. 똑같은 규칙 속에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고 사람들은 이 차이를 즐긴다. 스포츠도 도박도 온라인 게임도 모두 같다. 모 방송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쟁반 노래방’을 볼 때의 즐거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놀이가 일상성을 갖지 못할 경우 놀이는 문화가 되지 못하고 현상에 머물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게임과 플래시몹, 외계어 사용 등을 일상성이란 스펙트럼에 비추어 본다면 각각 조금씩 다른 색깔의 빛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