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실린 '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 사진 (미국 사진작가 애덤스, 1968)애디 애덤스
‘인기 검색어’ 순위는 네티즌이 가장 많이 열람한 자료의 통계이면서 동시에 포털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부메랑 효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성 연예인 누드 열풍을 부추긴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포츠연예신문과, 이들 기사들을 주요 콘텐츠로 즐겨 활용하는 포털들이 한결 같이 이승연씨를 성토하며 인터넷 여론 재판의 심판대에 배심원으로 등장한 것은 실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타블로이드판 신문들과 24시간 하루종일 방송되는 헤드라인뉴스의 케케묵기 그지없는 지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 같은책, 39쪽 )
베트남전 이래로,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필름에 담겨지게 된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 같은책, 43쪽 )
매체의 선정성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보라. 오락거리로서의 강도얼짱, 왕따동영상을.
사회자 없는 온라인 토론의 맹점
인터넷 여론 재판이 가장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은 각 언론사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의 토론방이다. 온라인 토론방의 가장 큰 취약점은 대립하는 양쪽의 의견을 조율할 만한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토론의 자율성을 저해해서는 안되지만 진정으로 토론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장치가 꼭 필요하다. 모 언론사 홈페이지의 경우 토론방에 간접적으로 ‘사회자’ 기능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활용도면에서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사실 확인 없이 ‘~카더라’ 수준의 기사를 양산하는 기자들과 언론 매체가 일단 문제이겠지만, 그건 네티즌이 스스로 비판적인 시각으로 걸러낼 수 있는 문제라고 봐 준다고 하면, 최소한 자체 운영하는 토론방만이라도 전문적인 토론 운영자를 배치하여 토론방이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한 공개 처형장이 아닌 진정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정상적인 미디어 기능에 대해 앞서 제기한 비판들에 대해 포털은, ‘우리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라고 말하고, 비판이 잦아들면 ‘우리도 미디어이다.’ 라고 설쳐댄다.
인터넷 여론 재판의 범주에 안티 문화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 사안들에 대해 각각의 안티 사이트나 페이지가 있고 그들의 건강한 비판 정신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의 안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인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를 살펴보자. 이곳의 절대 명제는 ‘재미’다. 재미있는 것, 그러니까 주목 받는 게시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패러디 저작물이 만들어진다. ‘안티’ 는 재미 생산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음악성 낮은 가수를 비판하고, 완성도 낮은 영화를 비판하며, 한심한 정치인의 행태를 비판한다. 하지만 재미를 배가하기 위해서라면, 패러디 정신(비판 정신)은 어느새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다른 이의 시선을 좀 더 끌기 위해 악덕의 요소와도 기꺼이 결합하기 일쑤다. 딸녀, 광녀, 핥녀의 경우를 돌아 보라.
누군가 이런 행태에 대해 비판한다면? ‘즐’ 또는 ‘KIN' 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당신이 틀렸다. 왜냐구? 짜증나서 말하기도 싫다. 반응하기 귀찮다.’ 는 말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왜 디시인사이드를 비판하는가. 단지 재미라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그들이 이미 너무 거대해졌기 때문이며 ‘단지 재미’ 라는 손쉬운 대답 아래 묻혀버리는 타인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보기 싫은 끔찍한 장면을 볼 때 두 눈을 감아버리는가 하면, 훨씬 더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는 존재다. 조르쥬 바타이유는 1905년 중국의 한 죄수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당하던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매일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미인 달기의 환심을 얻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은나라 주왕이 벌인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달기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백성들이 바친 피 같은 세금을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대공사에 탕진했고, 죄인들로 하여금 시뻘겋게 달궈진 원통의 구리 막대 위를 걸어가게 하여 결국 끝까지 건너지 못하고 발바닥이 지글지글 타들어가며 숯불 밑으로 추락하면 그제야 달기는 즐거워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의 대상임과 동시에 스펙터클한 즐길 거리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고 한 수전 손택의 말은, 달기와 주왕이 벌인 일들이 규모만 다를 뿐,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서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는 행위임을 경고하는 섬뜩한 선언이다. 그가 지적하듯 ‘사진의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리기 때문에 잘못된 것’ 이다. 소문(텍스트)이 두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미지)로 바뀔 때, 인터넷 여론 재판도 이미 다 끝나버린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타인으로서의 한 개인에게 가해질 고통이 타인의 사소한 즐거움과 혼재될 때, ‘O양 비디오’ 가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에 기여했다는 천박한 추론의 기사가 만들어지는 비극도 발생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것에 함몰된 인터넷 문화의 일면은 나를 포함한 네티즌 개인이 건너야 할 딜레마다. 웹에도 토끼굴이나 개구멍이 있어 슬쩍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둥그런 교수형 밧줄의 배경 그림 위에 ‘죽겠습니다.’ 로 시작하는 시뻘건 글씨의 의류 할인 매장 포스터가 동네 담벼락에 붙었다. 옷을 안사주면 죽겠다는 말인지, 죽이겠다는 말인지. 인터넷 여론 재판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선혈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이 교수대 그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소설 한 구절을 읽으며, 우리의 분노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의 여론 재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뒷좌석에 있는 동료 무전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통신을 단념하고 안테나를 걷어치웠을 것이다. 파비앙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 자신이 양손을 놓기만 하면 당장 그들의 생명은 허무한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양손에 동료와 자신의 무거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자 그는 갑자기 자기 손이 무서워졌다.' - 생떽쥐베리, <야간비행>
타인의 고통 -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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