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베체쉬, <은유>, 한국문화사.한국문화사
우리가 흔히 '죽은 은유(사은유)'라고 말하는 진부한 표현들을 비롯해, 은유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커베체쉬의 저서 <은유> 에 따르면 이 죽은 은유가 어쩌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살아있는' 은유일 것이라고 말한다. 속담을 비롯해 우리는 수많은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은유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은유가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늘 동일한 '층위'에서 다뤄져야 하는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냈던 수수께끼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아침에 네 발로 걷고, 한 낮엔 두 발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것은 인간의 유아기, 성인기, 노년기의 은유인데, 만일 세 번째 부분을 '저녁엔 세 개의 머리가 생기는'이라고 바꾼다면 뜬금 없지 않겠는가. 어긋나 보이는 것은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걷는 것으로 비유를 했다면 같은 층위 내에서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층위가 약간 어긋난 비유를 살펴 보자.
(…) 우리는 북한 주민의 2년치 식량 구입비에 육박하는 십수조원을 오로지 사교육에 쏟아 붓는다. 그럼에도 교육경쟁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빚을 내서라도 과외를 시켜야 하고, 사교육 때문에 아파트값이 급등한다. (…) (<문화일보> 2004.1.10.)
전달하려는 의도가 파악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지만, 사교육에 '낭비'되는 돈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같은 층위에서 비교를 하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북한 주민의 식량 구입비로 빗대기보다는 동일한 층위 내의 '교육' 분야를 예로 들었다면 어떨까. 그 정도 비용이라면 공공 도서관을 몇십 개는 지을 수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말이다.
같은 층위 내에서의 적절한 비유는 글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좋은 기법이 될 수 있고, 과잉의 감정이 절제된 은유 기법은 처음엔 미약해 보이지만 나중엔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됨을 종종 경험하고 발견한다.
동일한 층위를 지켜야 재미있는 퀴즈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있다/없다 퀴즈.
팔보채엔 있고 양장피엔 없는 것
세븐에겐 있고 휘성에겐 없는 것
말죽거리 잔혹사엔 있고 실미도엔 없는 것
이 문제의 매력은 답을 맞히는 게 아니고, '동일한 층위' 에서 새로운 질문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답을 알아낸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즐거움이다.
'팔보채엔 있고 스파게티엔 없는 것' 이렇게 문제를 만들면 규칙 위반이라 재미가 없다. 층위가 어긋났거나 너무 광범위해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 은유도 마찬가지다.
<시사저널> 738호의 ‘잠들지 못하는 '야광나무' 의 슬픔’ 이라는 기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