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목포 정명여고 3학년 때 학교 교정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승희 열사.
박승희열사정신계승사업회
1989년 승희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외치며 참교육을 표방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창립됐다. 당시 정부와 학교 측은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한 부당징계를 시도했다. 이에 맞서 학생들의 징계 철회 투쟁이 확산됐고, 이 과정에서 목포의 고등학생들은 학생회 활동을 중심으로 한 '목포지역 고등학생 연합(이하 목고련)'과 학생들 개개인의 활동을 앞세운 '자주교육쟁취 고등학생연합(이하 자고연)'을 조직하여 적극 투쟁에 나섰다.
이때 승희도 함께 활동하였다. 특히 구신서 선생님을 비롯한 김대중, 고윤혁 등 10여 명의 정명여고 교사를 포함해 목포 지역 전체에서 4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자 학생들은 목고련과 자고연을 중심으로 해직 교사 복직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특히 정명여고는 당시 고3 10개 반 담임 중 5명이 해직될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했다. 이에 고3 10개반 실장들이 주도해 기말고사 백지 답안지 제출, 수업 거부 투쟁을 벌였다. 낮에는 운동장에서, 저녁에는 대강당에서 매일같이 전교생이 농성을 했다.
그러나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고3들이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0개반 실장 중 4명을 제외하곤 모두 학생회 간부직까지 사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8반 부실장이었던 승희는 늦은 밤에 대책을 논의하던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반이 모두 공부를 하겠다고, 실장을 비롯해 전원 싸움을 포기했지만 나는 우리 반 50명을 대표해서 앞으로 회의도 나오고 투쟁에 앞장서겠다."
그때부터 승희는 마지막 졸업식 날까지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처럼 전교조 투쟁을 통해 실천적 의식의 성장을 이루었던 승희와 같은 전국의 고등학생 세대들을 우리는 '참교육 1세대'라 부른다. 당시를 회고하는 승희의 정명여고 친구인 주현씨의 말이다.
"더 바보였던 승희는 먼저 떠났고, 조금 덜 바보였던지 우린 지금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커피와 콜라 마시지 않고, 삼푸와 린스도 쓰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