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해...' 비지땀 흘리며 108배반값등록금국민본부 안진걸·김동규 공동집행위원장이 제헌절인 17일 낮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헌법에 따라 평등한 고등교육권 확보와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08배를 하고 있다.
권우성
산업화 시기, 한국의 대학은 국민들의 계층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학벌'이라는 후광을 얻는 일은 상류층에 속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하류층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했던 당시, 대학은 개천의 이무기를 용으로 만들어줄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가난을 헤쳐나가고 성인이 된 이후의 삶까지 보장해줄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하면서 기성세대들의 수많은 자수성가 사례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공한 이들의 과거는 흔히 가난과 시련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가난 속에서 힘겹게 공부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한국사회의 리더로 성장하는 이야기들은 종종 진부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진부한 이야기들이 우리 세대에서는 좀처럼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종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돈 없는 고등학생 가출 결심... 결국은 '공부' 선택저는 지방 소도시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4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는 애초에 느낄 수도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춘기를 겪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줄 몰랐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는 중식감면과 종종 현금으로 지급되는 장학금을 받았고, 중∙고등학교는 등록금 지원과 중식감면을 받으며 다녔습니다.
돈 없는 고등학생으로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저지른 비행이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방황했고, 좀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공부를 선택했습니다. 집과 학교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보자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좋은 대학에 대한 집착은 컸지만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제 성적을 담보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재수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던 그 1년의 시간은 저에게 '명문대'라는 보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합격의 기쁨은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등록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졸업하고 직장을 갖기 전까지는 절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 첫 학기 등록해야 했습니다. 대출 원금은 아직까지 단 한푼도 갚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대학은 희망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졸업만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만 같은데, 정작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매 학기마다 신청한 장학금이 얼마나 나올지 가슴 졸일 수 밖에 없었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과외를 두 세개씩 해야 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 공부는 결국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학 내내 일만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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