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3월 10일자 1면
조선일보
출사표를 올린 곳은 <조선일보>였다.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나는 해적이 아니다'라며 울먹이는 예비역 해군 장성의 사진 위로 중국이 이어도를 넘보고 있다는 섬뜩한 머리기사를 실었다(2011년 3월 10일자). 그 뒤로도 두 면에 걸쳐 "항모 가진 중국, 이어도 분쟁 유도... 제주 앞바다까지 노린다", "원유 99% 통과... 15일 이상 막히면 수출입 올스톱" 등의 굵은 제목들이 이어진다. 마치 전시 동원령이라도 내릴 듯한 분위기다.
어쩌면 지난 2월 22일,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그것도 지지율 30%를 밑도는 이 정부가 5년이나 끌어온 공사를 밀어붙이겠다며 뒤늦게 으름장을 놓을 때부터 이미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떻든 결국 이번 선거도 '전쟁'을 비껴갈 수 없게 되었다. 저 멀리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당신과 내가 더 이상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침착하자. 마치 전쟁이라도 부추기려는 듯한 푸닥거리에 놀아나서도 안 되지만, 중국이라는 유령을 두고 저들과 지루하게 다투는 일도 어리석긴 마찬가지다. 그에 앞서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대체 지난 5년 동안, 제주도 푸른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는 구럼비 바위 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지난 5년간 강정마을에선 무선 일이 벌어진 걸까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7년 4월의 일이었다. 구럼비 바위를 낀 강정마을이 느닷없이 새로운 해군기지의 후보지로 떠올랐다. 2002년부터 제주도와 해군 당국이 후보지로 점찍었던 화순마을과 위미마을 등이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벌써 5년째 사업이 겉돌던 때였다. 그러자 조급해진 당국이 이번에는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즈음 새로운 후보지로 정한 곳이 바로 구럼비 바위가 있는 강정마을이었다.
강정마을의 회장은 당국의 뜻에 따라 '조용히' 총회를 열었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이 제주 해군기지의 새로운 후보지로 꼽혔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권자만 1000명이 넘는 제법 큰 마을에서 그날 총회를 찾은 주민은 겨우 87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서 강정마을 주민들의 운명이 박수로 정해지기까지는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는 조심스런 의견 따위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묵살되기 일쑤였다고 한다(KBS <추적 60분>, '5년째 반대, 강정마을엔 무슨 일이?', 2011.9.7).
그리고 한 달 뒤 제주도는 강정마을을 해군기지의 새 후보지로 정부에 올렸고, 또 한 달 뒤 정부는 이를 확정했다. 5년을 지루하게 끌어온 문제가 두 달 만에 '조용히' 풀린 것이다.
마을은 그제야 술렁이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주민들은 새 회장을 세웠다. 그리고 주민투표로 주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누군가 투표함을 빼앗아 달아나버린 어이없는 사건 때문에 이미 한 번의 주민투표가 무산된 뒤였다. 주민들에게 의견 묻기를 두려워하던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주민투표는 어렵게 이루어졌고, 1050명의 유권자 가운데 725명이 참여(69%)한 이 투표에서 무려 94%의 주민이 반대표를 던졌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안타깝게도 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책 사업을 주민 투표로 결정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2년 뒤인 2009년 12월 제주도 의회는 구럼비 바위 일대가 포함된 공사 예정지에 대한 '절대 보존 지역' 지정을 풀어버렸다. 의회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들이 나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이다. '절대 보존 지역'의 축소·해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주민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있었지만, '경미한 사항'이라는 이유로 도의회는 그 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는 대한민국 국회가 나섰다. 2012년에 잡혀있던 해군기지 예산 가운데 96%에 달하는 1278억 원을 여야 합의로 삭감한 것이다. 5년 전인 2007년 12월 당시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내세웠던 '민·군 복합형 기항지 건설'이라는 조건을 정부와 해군이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머지 4%는 육상설계비와 보상비일 뿐이니, 대한민국 국회가 정부와 해군을 향해 더 이상 공사를 하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지난 2월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은 뒤, 2011년에 쓰지 않은 1084억 원과 올해 잡힌 49억 원으로 기어이 공사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회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제주에 해군기지를 짓겠다며 지난 5년 동안 정부와 해군이 벌여온 일들이 대략 이렇다. 그 사이 주민들의 삶은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렸고, 오랜 세월 지켜온 마을 공동체마저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경찰은 걸핏하면 소환장을 보내 겁을 주고 벌금을 물렸다. 지금까지 집집마다 뿌려진 소환장이 200장이 넘고, 2010년 이후에 물린 벌금만 2억 7000만 원에 달한다. 또 가까운 이웃과 친척 사이에도 편이 갈려 멱살잡이가 벌어지기 일쑤라고 한다. 강정마을의 풍경은 이처럼 스산하기만 하다.
구럼비 바위를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