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먼저 5·16을 '조선건국'에 유추하는 논리가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의 건국 이후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 동안이나 존속된 세계 최장수 왕조입니다. 반면 1961년에 구축된 5·16 체제는 1969년 삼선개헌으로 변조되고 1972년 유신발동으로 기형화된 끝에 1979년 김재규의 총 한 방으로 휘발돼 버린 1인 단막극이었습니다. 따라서 5·16을 조선건국에 빗대는 것은 과대망상적인 발상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5·16은 구국의 영단'이라는 박 위원장의 '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5·16은 자타가 인정하는 군사반란, 즉 쿠데타입니다. 그리고 박정희의 18년 공포정치는 독재정치의 속성을 모두 구비한 2차대전 이후 세계 최악의 통치체제였습니다. 박정희의 등장과 체제구축 과정과 말로는 독일의 히틀러, 이란의 팔레비, 필리핀의 마르코스, 베트남의 티우, 칠레의 피노체트, 니카라과의 소모사 등 기라성(?) 같은 독재자들의 속성을 종합세트처럼 갖춘 것이었습니다.
더러는 경제발전의 논리로 박정희의 통치를 변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박정희의 18년 세월에 달성된 국민소득 1644달러의 의미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그 정도의 경제성장은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나 우리 국민의 우수성, 근면성에 비추어 보아, 장면이나 윤보선이 집권했다손 치더라도 별반 차이가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경제는 박정희 시대 이상의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박정희 통치의 부작용과 후유증에 있었지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국인의 국민소득은 IMF 위기를 맞아 1만 달러에서 6000 달러로 급락했습니다. 박 위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버지가 일으킨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팠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대목 역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위원장의 말을 정확하게 고친다면, '아버지가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골병 든 나라'라고 해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5·16은 '구국의 영단'이 아니라, 말을 만들어 하자면, '망국의 독단'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박 위원장, '10월 유신'의 본질을 아십니까박 위원장, '철학'이라고 했습니까? 박 위원장은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 위원장은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0월 유신은 중임제 대통령이 아니라 '종신제 대통령' 개헌이었습니다. 중임제 개헌을 제기한 노무현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면 종신제 개헌을 총칼로 밀어붙인 아버지는 어떤 대통령이었을지 짐작이라도 가지 않는지요?
박 위원장은 '혹시 '유신'이라는 말의 출처를 알고 있는지요? 물론 '유신'이라는 용어는 중국 고전 <시경> 등에 보입니다만, 현대적 의미의 '유신'은 아버지가 그토록 선망해 마지않았던 '메이지유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천황제의 절대왕정을 구축했습니다. 10월 유신 이후의 박정희는 사실상 일본의 천황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또 하나, '소화유신'이란 게 있었지요. 이에 대한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박정희에게는 명치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소화유신(쇼와유신)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명치유신을 재현해 보자고 1936년 2월 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들 황도파 장교들이 5·16 군사반란 이전 박정희의 또 다른 모델이었다." - 한홍구 <유신의 정신적 뿌리>이런 10월 유신을 대한민국의 존재와 결부시키다니요? 이것은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에 대한 모독이자 지성과 '철학'의 파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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