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규 전 KBS 노동조합 위원장
유성호
KBS 사장으로 온 뒤 참 많이도 들어 온 이야기였다. 한나라당, 조중동 등 우리사회의 수구 기득권 세력뿐 아니라 KBS 내부에서도 나왔던 소리였다. 특히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현 보도본부 탐사보도팀 '시사기획 쌈' 데스크)은 공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노사협의회 때도 구체적으로 몇몇 프로그램을 지칭하면서 편파적이라고 몰아세웠다.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의 성향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인터뷰가 있다. 나에 대한 퇴진 압박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지난해 6월 26일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승규 위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 노조가 20일 발표한 성명을 보니 '사내 일부 친정(친 정연주) 세력'을 다시 한번 강조했던데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고 보나."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보기엔 KBS PD협회는 다수가 그렇고, KBS 기자협회는 회장과 집행부, 그리고 젊은 기자들이 그렇다. 개혁적 부분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오늘도 보수단체가 와서 빨갱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 아닌가."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여과 없이 드러낸 이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개혁에 대한 거부감, 프로그램 편파성 주장, 당시 KBS 노동조합 집행부의 빛깔이었고, 진종철 노조 때부터 지금까지 3대째 KBS 노동조합 집행부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이라는 깃발만 내걸었을 뿐, '노동'과는 거리가 먼, 기득권 세력이자, 권력집단일 뿐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방송의 독립성을 위해 노력해 온 KBS 노조의 전통과도 이미 유리된 집단이다. (진종철, 박승규 노조의 실체는 차차 증언하도록 하겠다).
"MB 화끈하지요?" - 재벌사 사장의 독단성과 폭군성"특정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성향에 문제가 있다"는 이명박 후보의 말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다투거나 논쟁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그런 자리도 아니었다. 나는 수신료 인상 문제에 대해 잠시 설명을 했고, 이명박 후보는 다시 KBS의 공정성과 구조조정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맴돌았다.
그를 배웅하고 나자, 당시 KBS 정치팀 야당반장을 하던 이춘호 기자(현 청와대 출입)가 내게 와서 "사장님, MB 화끈하지요?" 그랬다. 나는 그냥 웃었다. '화끈하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는 그 날 이명박 후보와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형적인 '재벌회사 사장'을 보았던 것이다. KBS에 와서, 광고 때문에 광고주인 대기업 또는 재벌회사 부회장, 사장들과 같이 술을 마신 적이 더러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일부의 행태는 대략 비슷했다. 남의 말에 잘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을 많이 하고, 거침이 없고, 심한 경우 안하무인이었다. 이춘호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화끈했다".
재벌 오너인 회장에만 충성을 다 하면 되고, 회장만 빼면 나머지는 죄다 절절 매는 졸병들이 아닌가. 그러니 거침이 없었다. 명령만 하고, 호통만 치면 그게 '강력한 리더십'인 것이다.
95년 봄,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때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이자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판을 해온 노암 촘스키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때 인터뷰 진행 도중 그는 불평등이 확대되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20세기 초 세개의 거대한 독재 전제주의적 폭군(tyranny)이 등장했는데, 볼세비즘, 파시즘,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그게 뭔지 아는가?"나는 선뜻 답을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자본을 배경으로 한 사기업이다. 볼세비즘, 파시즘은 이제 거의 붕괴했다. 그러나 자본의 힘을 가진 기업의 독재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하다. 그 힘은 이제 국가의 힘을 넘어서 있으며, 자본, 세계경제, 세계무역을 장악하고 있다. 기업 독재권력의 확대는 외환에 대한 규제를 없애면서 크게 촉발되었다. 국제외환에 대한 규제가 없어짐으로써 투기성 금융자본은 거대한 폭발을 하게 되었다. 거대 금융자본이 국경도 없이 넘나들면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촘스키 말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그 거침없이 화끈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명박 후보를 처음 직접 대면한 뒤 내 머리를 스쳤던 생각은 광고 때문에 만난 거대기업 부회장, 사장의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독단과 일방주의, 촘스키가 이야기한 대자본을 배경으로 한 사기업의 '폭군' 이야기였다.
참으로 혹독하고 야비한 보복들그리고 그런 생각은 이명박 정권 출범 뒤 발생한 일련의 사태와 바로 연결되었다. 용산 참사, 미네르바 사건, PD 수첩 사건, 시국 선언한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과 사법적 징벌, 촛불 시위자들에 대한 사법적 징벌, 온갖 권력기관들의 정치세력 종속과 정치사찰 부활, 나의 해임을 비롯한 공기업 사장들의 강제 퇴임, 사회적 저항자에 대한 연좌제, 박원순 변호사 사건에서 보듯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돈줄 씨 말리기, 진중권 교수의 강의 박탈, 시중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광고주에 대한 직간접적 압박(권력기관에서 "지혜롭게 사시라"고 한다던가?), 진보언론 광고 고사 현상, 이로 인한 여론의 편중 심화와 다양성 소멸, 그리고 이 모든 역사 역류의 가장 상징적이고 집약적 사건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자신 몸의 반쪽이 무너진 후 석달 만에 끝내 온 몸이 무너져 버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독단과 일방주의, 폭군적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정권 차원뿐 아니다. 그 아래 종속되어 있는 하부조직의 폭군적 행태는 더 구체적이고 잔인하다. 정권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린 듯한 KBS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런 것들이다. 박승규 노조위원장이 이야기한 바 있는 '친정 세력'에 대해 KBS에서는 참으로 혹독한 보복이 가해져 왔다. 미운털이 박혔다고 여겨지는 사원들을 지방으로, 또는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엉뚱한 부서로 발령을 내는가 하면, '정연주 빛깔'이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죄다 없애거나, 프로그램 이름을 바꾸면서 프로그램 성격까지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