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들. 좌로부터 강경상고 관사- 구 한일은행- 중앙초등학교 강당- 남일당한약방 순이다.
안병기
다시 채운교를 건너서 강경읍내로 돌아온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 강경공립상업학교인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가 있다. 1920년에 개교한 옛 강경상고는 한때 지방 명문고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학교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관사는 교문으로 들어가서 좌측 편에 있다.
1931년에 지었다는 이 교장 관사는 군산 동국사 대웅전과 많이 닮았다. 동국사라는 일본식 절집은 고은 시인이 처음 출가했던 절이다. 그는 거기서 혜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중장학을 배웠다. 처음 지을 적엔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는데 벽돌집으로 바꿨다. 이음 형태로 아래로 길게 늘인 지붕이 특징이다.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를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경 중앙초등학교를 찾아간다. 1937년에 지어진 강당은 붉은 벽돌을 쌓은 벽체에 목조 트러스를 얹은 건물이다. 단순함을 넘어 단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붉은 벽돌색이 내가 어릴 적에 자주 보았던 광주 수창초등학교 본관 건물을 연상시킨다.
세 번째로 찾은 건물은 서창리 강경우체국 앞에 있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이다. 척 보니 일제시대 때 지은 전형적인 은행 건물이다. 붉은 벽돌을 쌓아서 지은 것이나 형태가 군산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인 제일은행 군산지점과 비슷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개조하는 중인지 내부를 모조리 뜯어 놓았다. 마구잡이식 관리로 건물의 가치를 잃어버린 제일은행 군산지점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지 적이 염려스럽다.
구 남일당 한약방을 찾아가려고 연만하신 분들을 붙들고 길을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생각다 못해 근처에 있는 한약방을 찾아갔다. 일흔이 넘은 한약방 주인은 자신이 남일당 한약방에서 배워서 한약방을 차린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제야 위치를 제대로 알겠구나!'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남일당한약방의 위치를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곳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자리가 아니라 원래 남일당 한약방이 있던 자리였다.
그에 따르면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은 본래 남일당 한약방이 아니라고 한다. 한약방의 위치와 관련해서 자신은 누구와도 인터뷰한 적이 없었는데도 신문엔 마치 자신이 위치를 지적해 준 것처럼 보도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위치를 정정하겠다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 간에 싸움밖에 더 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가며 현재 지정된 장소를 알려준다.
약도를 갖고도 남일당 한약방이 있는 골목을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0년대에 찍은 강경시장 전경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건물 중에서 남일당 한약방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예전 군산 영화동에서 흔히 보았던 변형된 한옥 형태다.
남일당 한약방은 어디 있나요? 제발 가르쳐주세요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보성 아파트 뒤 테마공원 앞에 있는 구 강경노동조합 건물이다. 1925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원래는 2층 한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층만 남아 있다. 한식 구조와 일식 구조가 절충된 건축형태인데 이미 외관을 많이 손댄 듯하다. 근대기 노동자 조합이 사용한 건물로 노동사와 지역사에 가치가 있는 건물이니 이대로나마 잘 보존했으면 싶다.
구 강경노동조합 근처는 옛적 강경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지역이다. 얼마 전에 젓갈축제가 끝났는데도 가게마다 손님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강경 젓갈이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탄 데는 매스컴의 영향도 없지 않지만 본래 물맛이 좋은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강경의 물맛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뒤로 큰 강이 흘러 조수와 통하였는데 물맛이 그리 짜지는 않다. 마을에 우물이 없어 온고을 집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어 두고 강물을 길어 독에 부어둔다. 며칠이 지나면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는데 윗물은 맑고 시원하여 비록 여러 날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 둘수록 더욱 차가워지며 수십 년 동안 장질을 앓던 자일지라도 일 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를 뽑는다 한다. 어떤 사람은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토질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상등급이다"라고 말한다. - <택리지> 중 '팔도총론' 충청도편에서" 강경읍내 중앙리와 서창리에 집중된 근대 문화유산들은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남긴 선물이다.
1970년대 중반, 제일은행 군산지점이 제멋대로 개조돼 나이트 클럽으로 쓰일 때 군산지역 문화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원형보존을 극구 주장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던 옛일이 떠오른다. 제아무리 치욕적인 일제의 잔재도 결국 우리가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는 문화유산이라는 합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세월이 요구됐던 셈이다.
고여있음과 정체가 없었더라면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들은 벌써 다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옹지마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무생물인 건물에게도 통용되는 말인가 보다.
마음의 갈피에 고이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