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가을부석사의 단풍은 수더분하고 넉넉하다.
장호철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려면 날이 차가워져야 한다고 했던가. 정직하게 돌아온 가을을 제대로 느끼려면 길을 나서야 한다. 무심한 일상에서 가을은 밤낮의 일교차로, 한밤과 이른 아침에 드러난 살갗에 돋아오는 소름 따위의 촉각으로 온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 가을은 촉각보다 따뜻한 유채색의 빛깔로, 그 부시고 황홀한 시각으로 다가온다.
시월의 마지막 주말, 길을 나선다. 대저 모든 '떠남'에는 '단출'이 미덕이다. 가벼운 옷차림 위 어깨에 멘 사진기 가방만이 묵직하다. 시가지를 빠져나올 때 아내는 김밥 다섯 줄과 생수 한 병을 산다. 짧은 시간 긴 여정에 끼니를 챙기는 건 시간의 낭비일 뿐 아니라 포식은 더러 아름다운 풍경마저 심드렁하게 만든다.
오늘의 여정은 영주 순흥, 소수서원과 인근 태백산 자락의 화엄종찰 부석사를 거쳐 안동 풍천 언저리를 도는 것이다. 안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병산과 화천, 두 서원이 있고, 그 물굽이엔 물돌이동 하회가 있다. 한갓지게 또 고리타분한 서원이냐고, 이 화창한 가을날 나들이가 고작 구태의연한 절집이냐고 하지 마시라.
서원이든 산사든 거기 가득한 가을의 풍경을 볼 일이요, 마음먹은 답사가 아닌 바에야 성리학의 이념이나 광대무변한 불법의 세계에 짓눌릴 일은 없다. 서원의 강당이나 절집의 전각은 오롯이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목조 구조물로, 그 안온한 마당을 스쳐가는 천 년의 바람이야 상기도 이어지는 세월의 자취로 바라보면 그뿐이지 않은가.
선비의 도포를 스치던 바람, 지금 내 옷자락 만지네영남은 서원의 보금자리였다. 이른바 성리학의 정맥이라는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본고장이었던 영남이 서원은 물론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 터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원래 경관이 뛰어난 절터나 퇴락한 사찰은 서원의 입지로 으뜸이니 소수서원과 함께 옥산서원·노강서원·임고서원·청성서원 등이 그러한 곳이다. 사찰에서 서원으로의 이행은 문화 교체에 따른 공간 점유의 계승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유교 질서의 수립이라는 정책적 의도와도 이어진다. 회헌을 도학의 조종으로 받든 주세붕이 숙수사 옛터에 서원을 열면서 땅속에 묻혀있던 구리 수백근을 캐내 서원의 밑천으로 썼다던가.
처음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다. 뒤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의 건의에 따라 명종은 1550년 백운동 서원에 친필로 쓴 액(현판)과 서적을 하사함으로써 이 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새로 태어난다. 사액과 함께 서원에 학전과 노비를 주고 이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의 특권을 주었다.
학문에 대한 국가적 장려를 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지원이 후일 관학의 쇠퇴는 물론, 국가 재정과 자원의 궁핍을 불러오고 만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 곳곳에 사액서원이 세워지는데 이는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한 데다 퇴계·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서원 건립에 앞장선 것에 힘입었다.
국가 공인 사학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훼철을 면한 마흔일곱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가을이 깊은 서원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선비촌과 소수박물관을 한데 묶은 입장료는 3000원. 이웃한 부석사 입장료(1200원)에 비하면 입이 벌어지지만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리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수더분한 처마 끝, 연록빛 단풍 걸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