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가덕면 부역혐의자 100명이 구금됐던 곳
박만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인민군은 1950년 7월 13일 충북 청주에 입성했다. 청주시를 계란 흰자처럼 둘러싼 충북 청원군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가덕면 행정리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김인제는 부모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창고 씨나락 독으로 들어갔다. 씨나락 독은 해마다 추수한 벼 중 다음 해에 종자로 쓰기 위한 볍씨를 저장하는 독을 말한다. 쌀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가에 씨나락 독이 있는데, 김인제 교감의 형 집은 농사 규모가 커, 씨나락 독이 벼 세 가마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마침 모내기를 한 뒤라 씨나락 독은 비어 있었다.
김인제가 씨나락 독에 들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독 위에 나무판자를 올려놓고, 그곳에 농기구를 올려놓았다. 김인제만이 몸을 피한 것은 아니다. 그의 동생 김학제(당시 15세) 역시 인공시절 친구 집 골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인민군의 심부름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인제 어머니는 두 아들의 밥을 두 달 반 동안 매일 날라야 했다.
국군 환영대회 나갔다가...
하루 종일 듣는 소리가 어머니의 "얘야 밥 먹어라"는 소리와 창고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쥐들의 '찍찍' 소리였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니 기겁했다. 인공시절 김인제 교감처럼 집 안에 숨어 있던 행정초등학교 조재천 선생이 찾아왔다.
김인제가 숨을 죽이고 있자 조재천은 재차 "선생님 얼른 나오세요"라고 재촉했다. 행정초등학교 동료 교사인 조재천의 목소리를 확인한 김인제는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씨나락 독에서 나왔다.
"국군이 진주한답니다. 국군 환영대회를 열어야지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던 차에 낙동강으로 밀려갔던 국군이 수복한다니 뛸 듯이 기뻤다. 그 시간부로 김인제 교감의 두 달 반 동안의 씨나락 독 생활은 마감됐다(민간인학살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김인제와 조재천은 행정초등학교 부근 마을을 각각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소집했다. 학생들을 동원해 초등학교에서 '국군 환영대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조재천이 행정리 한말(한촌) 어귀에 들어섰을 때이다.
"야 이리 와"라고 대뜸 반말 지거리를 하는 이는 총을 든 군인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군인 양반"하는 환영 인사치레에 돌아온 군인의 대꾸는 "이 새X가"라는 욕설과 구타였다. 조재천은 더 이상의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가덕면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다.
당시 가덕면 국전리에 살던 김인제는 국전리의 중심마을인 양지말을 다니며 학생들에게 초등학교로 모일 것을 알렸다. 하지만 그 역시 조재천처럼 잠시 후에 군인에게 붙잡혔다. "왜 이러십니까? 우리는 여러분 환영대회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라는 항변을 했지만, 군인의 총 개머리판이 김인제의 어깨를 찍어 눌렀을 뿐이다.
똥지게를 지고 가던 청년도 연행
군인들에 의해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된 이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공무원만이 아니었다. 똥지게를 지고 가던 젊은이도 막무가내로 연행됐다. 똥장군이 깨져 청년의 옷에 똥이 튀어 구린내가 진동을 해, 주변 사람들이 코를 감싸 쥐었다.
평범한 농사꾼에 불과하던 행정리 오영식(당시 34세)과 인차리 김준호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집과 마을에서 연행됐다. 심지어 청원군 남일면 문주리 사람도 끌려왔다. 당시 가덕국민학교 교사였던 박희봉(24세)은 그의 사촌 동생이 인공시절 가덕면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됐다.
사실 박희봉은 특정 사상에 경도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마을인 남일면 문주리는 좌우익 갈등이 없었던 평온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단지 그의 사촌 동생이 가덕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왔다.
그렇다면 박희봉은 왜 남일면 소재지인 효촌리로 연행되지 않고 가덕면 소재지인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을까. 사실 문주리는 가덕면 병암리에 인접해 있는 마을로 생활권이 가덕면에 속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문주리에서는 박희봉뿐만 아니라 이장을 맡고 있던 노철우(당시 50세)와 의용군에 끌려갔다 온 전흥수(당시 18세)가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됐다.
가덕면 일대와 남일면 문주리에서 소위 '부역혐의'라는 혐의를 쓴 청장년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 중에는 인공시절 감투를 쓴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농사꾼으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덕초등학교에 구금된 이들은 31개 마을 약 100명이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일대가 막 수복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인간 사냥터가 된 것은 1950년 9월 29일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충북지역 군경에 의한 사건>, 2010).
자식 떠나보낸 아버지, 결국 총살
"남학희 나와" "누군데 초면에 반말이십니까?"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군인들이 다짜고짜 반말지거리를 하자 기분이 상한 남학희는 '철없는 아이 타이르듯' 대꾸했다. 그러자 군인은 "이 노인네가 미쳤나, 어디서 말대꾸를 해"라며 수염을 잡아당겼다.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마당에서 아버지가 곤욕을 치르는 소리를 들은 남상열이 뛰어나왔다. "당신들은 댁에 아버지도 없습니까"라며 항의했다.
"이런 빨갱이 새끼가"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 장교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 감투를 썼다가 군인들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다락방에 숨어 있던 남상열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총살당한 상황이었다.
행정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남상열의 아버지 남학희는 마당에서 자식의 허망한 죽음을 고스란히 보아야만 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만큼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남학희 역시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되어 그날 밤 불귀의 객이 되었다. 마을 인민위원장이라는 것은 기껏 이장에 불과한 것이다. 누군가는 맡아야 할 감투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자식을 먼저 보내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벌어진 일이다.
가덕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던 이들은 그날 저녁 초등학교 뒤편 야산과 맞은 편 야산, 두 곳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때 죽임을 당한 이중 오영식은 불과 5년 전에 일본에서의 지옥같은 생활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였다. 즉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동원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그가 해방을 맞이해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두고 서였다.
김인제가 총살당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행정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알려 줘 동생 김학제와 가족들은 병암리 가덕초등학교 맞은편 야산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김인제가 급소에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시신 주변 땅이 맨들맨들해져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형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김학제는 반백 년 넘게 형 시신 주변의 맨들맨들해진 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선거운동 했다는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