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민간인희생자위령비
박만순
'총기 16정과 다이너마이트 200발이 은닉됐다'라는 괴문서는 군인들을 춤추게 했다. 군인들은 문경면 갈평리와 인근의 중평리까지 사팔팔방으로 흩어져 가가호호 방문해 주민들을 검거했다. 청년이 잡혀간 지 사흘만인 1949년 9월 22일 아침 7시 경이었다.
"형기야. 담배 닢 바스러지지 않게 잘 옮겨라!" 아들과 함께 담배 건조실에서 마른 담배를 수거하고 있던 이수억(당시 40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이수억은 뒷결박을 당했다.
마을 주민 약 40명이 공회당 앞에 잡혀 왔는데, 청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갈평리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두 명 잡혀 온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 정필흠(鄭必欽, 24세)과 정필흠 형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정필흠(鄭必欽. 27세)이 그 경우였다.
마을에서 정백룡으로 불린 머슴 정필흠은 호적이 없었는데, 호적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일하던 작은집 주인 이름을 그대로 적어 넣은 것이다.
갈평리와 이웃한 중평리에서 잡혀 온 이는 중평리 구장 이갑성(1920년생) 이었다. 이갑성은 산판 일을 하면서 전답을 많이 소유한 마을 유지였다. 그는 산판 일 때문에 마을에 거의 거주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강권으로 구장(이장)이라는 감투까지 쓰게 됐다.
소위 빨갱이를 잡아들인다면서 좌익혐의자들을 잡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시골 마을에 좌익혐의자가 있을 리 만무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군인들은 갈평리 민보단장 과 부단장도 연행했다. 우익의 대명사인 민보단(民保團) 간부를 말이다.
죄인 아닌 죄인처럼 무릎 꿇린 주민 앞에는 저승사자처럼 군 장교가 서 있었다. 그는 주민 중 나이가 많은 박금출을 대열에서 호출했다. "문경탄광에 있던 다이너마이트 200발을 어디에 숨겼어?" 군 장교의 질문에 황당한 얼굴을 한 박금출은 "그게 뭔 소리라요?"라고 대꾸했다.
군 장교는 고분고분하지 않고 말대꾸를 한 박금출에게 다짜고짜 구타를 했다. 그러더니 잠시도 주저함이 없이 총살을 했다. 박금출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딸 이름을 불렀다. "귀자야!"
그렇게 박금출을 사살한 뒤 군인들은 '공산당 좋아하니 공산당 맛 좀 봐라'면서 사람들을 근처에 있던 밤나무 밑에다 몰아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몽둥이뿐만 아니라 곡괭이도 동원됐다. 이후 공회당 앞에 있던 주민들을 4km 떨어진 관음리 궁골로 끌고 갔다.(진실화해위원회, <예천·문경 민간인 희생사건>, 2010)
좌익 혐의로 잡혀갔던 그가 풀려난 이유
당시 관음리 '궁골'이란 곳은 원래 화전민들이 살던 곳이었다. 갈평리와 중평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붙잡혀 온 주민 약 30명은 궁골의 류씨 성을 가진 사람 집에 구금돼 취조를 당했다.
"빨갱이들에게 무엇을 제공했어?" 황당한 질문에 대답할 게 없었다. 돌아온 건 반복되는 매질이었다. 그렇게 10여 일 동안 지속된 매질 후에 총살이 집행됐다. 갈평리·중평리 주민 17명이 학살됐다.
그렇다면 군인들은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 10일 동안 조사를 했을까? 총과 다이너마이트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주민들의 빨치산 협력 혐의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아니다. 군인들이 10여 일 동안 주민들을 취조 한 것은 궁골의 류씨 집에 구금돼 있던 이들의 가족들로부터 뇌물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이는 사건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명확히 알 수 있다. 담배밭으로 가던 중 이장과 함께 온 군인들에 의해 공회당에 끌려간 이재교(1928년생)는 다시 궁골로 연행됐다. 류씨 집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밤에는 방이 비좁아 마당에서 자야만 했다.
그는 13일 만에 풀려났는데, 좌익혐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재교가 풀려난 것은 순전히 큰아버지가 손을 쓴 탓이다. 즉 없는 돈 있는 돈 긁어모아서 군인들에게 뇌물(?)로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재교와 그의 조카를 포함해 7명이 풀려났다. 그들은 돈이나 음식을 군인들에게 제공한 가족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총기와 다이너마이트는 어떻게 된 것인가? 총기 16정과 다이너마이트 200발이면 빨치산 거대병력이 무장할 수 있는 화력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즉 군인들은 갈평리 주민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문경면 관음리 황정마을에 주둔한 2사단 16연대(16연대는 1949년 6월 20일 2사단에 편입됐다 - 기자 말) 제3대대 소속 군인들은 인근 마을 이장들로부터 고기와 술 등을 대접받았다. 당시에는 '현지 조달'이라는 미명하에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음식을 제공 받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유독 갈평리 이장의 접대가 시원찮았다. 그렇게 해서 갈평리는 군인들에게 찍혔으며, 총과 다이너마이트는 그 와중에 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아부치기 위한 조작극의 재료가 된 것이다.
오줌 잘못 쌌다가 마을에 날벼락이...
갈평리 주민들이 공회당 앞과 관음리 궁골에서 전부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다. 공회당에서 관음리 궁골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황평석, 황응열, 이병국은 궁골에서 4km 떨어진 관음리 초입에서 학살됐다.
또한 한국전쟁 전에 문경군에서는 '궁골 사건'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문경군 여러 지역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승사 승려 사건'이다.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 주지 김남식(당시 52세)과 서기 이만도(당시 38세)는 문경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1949년 9월 24일 산북면 화장리 노루목고개에서 빨치산이 문경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과 민간인 등 10여 명을 몰살시켰는데, 이 사건에 대승사 스님들이 빨치산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혐의였다.
이들은 1949년 10월 2일 문경경찰서 산북지서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대승사 재정담당인 김성오가 1949년 9월 말 문경경찰서에서 전기고문 등 강압적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무혐의로 석방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조사라고 볼 수 있는 대승사 주지와 서기에 대한 조사는 문경경찰서가 아닌 산북지서에서 이뤄졌다. 사건은 지서에서 모든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발생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대승사 주지 김남식이 소변이 급해 지서 흙 담벼락에 실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한 군인이 이 모습을 보고 김남식에게 시비를 걸었고, 결국 지서로 끌려간 김남식 일행은 집단폭행을 당해 김남식은 그날 지서 안에서 사망했다. 군인을 말리던 이만도는 다음날인 1949년 10월 3일 문경군 동로면 수평리 무라니 마을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이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