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된 볼갱이고개 터
박만순
"아이고 이게 귀신여, 사람이여!" 어머니는 아들 석기호(가명)를 붙들고 곡을 했다. 아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누더기옷을 입은 채 정신이 절반쯤 나간 듯한 석기호는 '보도연맹원들이 비금도에서 모두 죽었다더라'는 소문을 비웃듯이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6.25가 터지자마자 전남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 석기호는 바닷가에 있던 암태지서에 연행되었다. 곧이어 목포경찰서를 경유해 목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서기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급전을 마련해 부랴부랴 목포형무소로 갔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무소 간수와 목포경찰서 경찰들이 모두 후퇴한 상태였다. 형무소 경비를 서고 있던 대한청년단원에게 물었더니, "모두 배에 싣고 가버렸소. 모두 죽었다대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석기호를 포함한 몇몇 보도연맹원들은 그 시간 유달산에 있었다. 경찰들이 목포형무소 감방문을 열고 보도연맹원들을 금강호에 실을 때,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지막 감방에 갇혀 있던 이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없어 후퇴하기에 급급해서인지, 무슨 착오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기호가 갇혀 있던 감방문을 열지도 못한 채로 경찰은 후퇴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 감방에 있던 이들은 한참 후에 감방문을 부수었다. 이들은 염라대왕이 붙잡을 것 같아 부리나케 유달산 쪽으로 뜀박질을 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산에서 며칠간 노숙을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세수는 고사하고 먹을 것이 일체 없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맸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얼굴과 손, 팔은 나뭇가지와 가시로 인해 생채기를 입었다. 며칠이 지나도 경찰이 자신들을 찾는 움직임이 없자 각자의 고향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친일경찰 물러가라
"친일경찰 물러가라!" "토지개혁 실시하라" 자은지서 앞에 모인 군중들은 23년 전 벌어진 소작쟁의 당시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자은면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농민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될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난 지 두 해 만인 1925년에 소작쟁의를 벌였다.
자은면 농민들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면 농민들이 살맛 나는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한 토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군정은 친일관료와 친일경찰을 재등용했다. 더군다나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치른다고 공포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두 달여 앞둔 1948년 3월 1일 자은지서 앞에는 수백 명의 주민이 운집했다. 자은면 대부분의 마을에서 청·장년들이 참석한 이날의 시위에 백산리에서는 박종남과 차덕근 등 5~6명이 참여했다.
이날의 3.1기념 시위는 결의문 낭독으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데 잠시 후 '탕'하는 소리가 났다. 백산리 표재혁이 쓰러졌고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쿨럭쿨럭하며 쏟아졌다. 경찰이 맨몸뚱이의 농민들을 향해 발포를 한 것이다. 표재혁은 며칠 후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해방 후 무안군 자은면에서의 최초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었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박종남은 경찰의 검거를 피해 영암군 월출산으로 피신했다. 시커먼 얼굴에 터벅머리를 한 박종남은 한국전쟁 전 경찰에 검거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주형무소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초부터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하기 하루 전인 7월 23일까지 광주 불갱이고개를 포함한 다수의 장소에서 20연대 헌병대 5중대 소속 군인에게 집단학살되었다.
자은면 3.1기념 시위 주도자인 박종남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광주시 일대에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박종남처럼 1948년 3.1기념 시위에 참여한 자은면, 임자면, 지도면 청·장년들은 이후에 빨갱이로 규정되어 온갖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무안군 지도면은 경우 1948년 3월 6일 3백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습격했는데, 참석자들의 이후 행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자은면의 박종남처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인공 때의 부역혐의로 UN군 수복 후에 군경과 우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서북청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