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그륜락 슈페트레제 리슬링싱그러운 복숭아, 배, 파인애플 등의 과실 향에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상큼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다.
임승수
나름 신경 써서 저녁상을 차려놓고 반주로 샴페인을 준비한 후 아파트 옆 동에 사시는 어머니께 건너오시라고 연락드렸다.
돌이켜보면 청소년기에는 그저 반항만 했고, 청년기에는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사회과학책 쓰는 작가가 되어 속 썩이고, 장년기가 되어서는 일하랴 두 딸 키우랴 정신없어서 연락도 자주 못 드렸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으로부터 도움만 받았지 제대로 보답해 드린 기억이 없구나. 이제라도 형편 닿는 대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준비해 자식을 키운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다. 특히 연말에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팔순 어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경로당에서 나이롱뽕을 하다 오셨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1천 원의 행복'이라는데, 게임 자체가 재밌는 데다가 판돈이 1천 원이라 잃더라도 큰 부담이 없고 심지어 요즘에는 따기까지 하신단다. 오늘도 따셨는지 현관문으로 들어오시면서부터 함박웃음이다. 할머니 소리가 듣기 싫어 갓 태어난 손녀한테 '민순씨(어머니 성함)'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로 젊게 사시는 분이다.
손녀들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고는 식탁에 앉으신다. 준비된 음식을 하나하나 내어놓고 샴페인을 잔에 따라드렸다. 관자구이 한 점을 씹어 드시고 샴페인을 들이켜시더니 '내 입에는 이게 딱이야'라며 매우 만족하신다. 지난번 호주 스파클링 와인은 아쉽다고 하셨는데 좀 더 가격이 있는 프랑스 샴페인은 귀신같이 알아채시네. 흐흐.
드디어 음식보다 비싼 케이크가 납시었다. 이게 뭐냐고 신기해하시는 어머니에게 호텔에서 사 온 놈이라고 말씀드리고 산타클로스 역할을 맡은 '슐로스 요하니스베르그 그륜락 슈페트레제 리슬링'도 따라드렸다.
이 와인은 좀 달다고 말씀드렸더니 '단 술은 별론데'라며 걱정하신다. 달달한 케이크에는 단 와인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케이크를 드신 후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삼키시더니 앞선 샴페인보다 더 맛있다며 깜짝 놀라신다. 어머니, 저는 비싼 와인을 귀신같이 감별해 내는 어머니의 미각에 놀랄 따름입니다.
행복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
케이크와 리슬링 가격을 물어보셔서 말씀드렸더니 놀라시면서 '나는 너희와 이렇게 함께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야. 너무 비싼 건 원치 않아'라고 하신다. 하지만 케이크 열심히 드시고 내 잔의 와인까지 본인 잔에 부어서 드시는 걸 보면 음식과 술이 정말 맘에 드신 것 같아 뿌듯하다. 다음에는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이렇게 와인을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마실수록 기분이 업된다니까. 그래서 행복해져."
목소리 데시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취기가 느껴져 그만 드시라고 말씀드렸지만 '내가 마시는 게 그렇게 아깝냐'고 농을 하시며 재차 내 술까지 빼앗아 가신다. 사람들의 통념처럼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라면 술을 빼앗긴 나는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데, 왜 흐뭇하기만 할까.
행복심리학 연구자인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집필한 <행복의 기원>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행복이다.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
삼십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염장질이 치사량에 이르지 않았던 것도 그나마 불알친구 둘과 떡만둣국을 먹었기 때문이고, 지금 이 순간 이토록 맛있는 와인을 빼앗기고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한 해를 마감하는 의미 있는 시간에 소중한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와인 병에 양말처럼 신겨진 산타클로스를 바라보니 그 망충한 표정이 한층 정겨워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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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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