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티나 자카니니 피노 그리지오와인병 목에 매달린 포도 나뭇가지는 액운을 쫓고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임승수
청포도 품종인 피노 그리지오는 재배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풍미도 다르다.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그리지오라고 부르지만, 프랑스는 '피노 그리(Pinot gris)', 독일은 '그라우부르군더(Grauburgunder)'다.
회색을 의미하는 그리(gris)에서 알 수 있듯 피노 그리지오는 엷은 회색빛이 감도는데, 프랑스의 피노 그리는 풀바디에 향신료 및 과실 향, 낮은 산도, 높은 알코올 도수, 유질감이 특징이다.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지오는 포도를 일찍 수확해 신선한 산도, 적당한 과실 풍미, 낮은 알코올 도수, 가벼운 바디감을 지향한다. 개인적으로 청바지와 면티처럼 상큼하고 편한 이탈리아 피노 그리지오가 맘에 든다.
피노 그리지오와의 첫 만남은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보라카이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였다. 숙박했던 리조트의 야외 식당이 워낙 유명한 포토존이라 일찌감치 방문해 자리를 잡고 식사 시간까지 뻗치기를 했다. 그냥 앉아있기 민망해서 메뉴판에서 가장 싼 와인을 골라 한 병 주문했는데, 바로 그 와인이 피노 그리지오였다. 가격은 1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저렴한 와인으로 주문한지라 기대 없이 마셨는데, 예상외로 '오! 이거 의외로 괜찮은데?'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복숭아, 배 향기에 싱그러운 산도가 어우러지니 마치 보라카이의 부드럽고 시원한 바닷바람 같았다.
식사 시간이 되어 해산물을 푸짐하게 시켰는데 음식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마트에서 피노 그리지오를 찾아보니 대체로 1만 원대로 저렴했다. 다만 천덕꾸러기처럼 저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게 안타까웠다.
사실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품종이다. 와인 단독으로만 보자면 좀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향이 강한 것도 아니고, 입에서 찐득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보니, 강렬한 레드 와인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맹물 같다고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하긴 나도 갓 와인에 빠졌던 때는 거의 레드만 마셨으니까.
당시 내가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라서 와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음식을 시종으로 여겼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근사한' 와인을 하나 산 후에 그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해서 마시는 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 와인 생활을 하니, 근사한 와인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곁들여 먹는 음식이 제한적이었다.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습관적으로 고기를 굽고, 화이트 와인을 마실 때면 해산물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10달러짜리 피노 그리지오를 만나 음식과 저렴한 와인의 기막힌 궁합을 체험한 후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음식이 주인이 되고 와인이 시종이 되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보쌈을 배달시켜 먹을 거면 보쌈과 잘 어울리는 적당한 와인을 준비하고, 마라샹궈를 먹는다면 또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마트에서 산다. 접근 방식을 바꾸자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비율이 높아졌다. 신선하고 은은한 풍미의 화이트가 한층 음식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와인이 음식을 거드는 역할로 물러서니 구매하는 와인의 가격도 전보다 확연히 낮아졌다. 그렇다고 만족도가 딱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시너지효과가 일어나는데, 고급 와인을 마실 때와는 결이 다른 만족감과 감동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와인 생활에 근본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음식이 주인, 와인은 시종! 레드보다 화이트!
소주에 물린 사람이라면
새해가 왔다. 지구는 어김없이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 365일 전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예수 탄생 때로부터 벌써 2024번이나 돌았다는데, 사람들은 이 도돌이표의 시작점을 새해라고 부른다.
새해 벽두에 스페인 사람들은 포도알 12개를 먹고, 덴마크 사람들은 이웃집 문 앞에서 접시를 깨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빨간 속옷을 입는다고 한다. 행위의 외양은 제각각이지만 지향은 동일하다. 복을 빌자는 게다. 나 또한 그런 의도로 와인을 한 병 깠다.
'칸티나 자카니니 피노 그리지오.'
와인병 목에 매달린 포도 나뭇가지는 액운을 쫓고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탈리아의 칸티나 자카니니라는 생산자가 만들었는데 피노 그리지오치고는 제법 몸값이 있어서 2만 원대 후반으로 구입했다.
오래간만에 보쌈을 주문했다. 피노 그리지오와의 궁합이 끝내주기 때문이다. 삶은 돼지고기 특유의 부드러움은 참으로 바람직해서, 온전치 않은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이도 고기 씹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한다.
고기 하나 김치 하나 포개어 입에 넣고 씹는다. 달짝매콤 보쌈김치와 촉촉담백 보쌈고기가 만들어내는 아삭아삭 우적우적 하모니는, 바이올린(보쌈김치)의 고음과 첼로(보쌈고기)의 저음이 어우러지는 현란한 이중주를 떠올리게 만든다.
화려한 이중주 감상 후 몰려드는 피로감을 시원하게 달래주려 피노 그리지오가 등장한다. 특유의 은은한 복숭아 향은 소싯적 즐겨 마시던 추억의 음료수 '이프로'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코올 도수가 12.5%인데도 이렇게나 목 넘김이 부드럽다니. 상큼·청량·깔끔하면서 쓴맛이 없고 기분 좋은 과실 향이 감도는 데다가,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 앞선 음식의 풍미를 요만큼도 거스르지 않는다.
소주에 물린 사람이라면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상위호환 주종인 피노 그리지오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한 병에 1만 원대라 소주보다는 다소 비싸다지만 소주 한 병이 360mL인데 반해 와인은 750mL다. 그러니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맛과 향은 소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하다(물론 내 기준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