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9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엄항섭의 기고문. 문일민을 '의사'라고 표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한편 문일민이 속해있던 국민의회에서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문의사원호임시위원회(文義士援護臨時委員會)를 조직해 적십자병원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문일민의 치료 회복을 적극 지원했다.
"애국자가 존경 못 받는 국가, 위기가 잠복"... 친일 청산을 호소하다
중앙청 할복 의거의 주인공이었던 문일민은 거사 후 2개월여가 지난 시점에 이르러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12월 20일자 <독립신문>에 '동지동포께 일언(一言)함'이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자신이 할복한 까닭을 밝힌 것이다.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 아래 인용한 글은 깨지거나 빠진 글자, 현대 맞춤법에 어긋난 부분들이 많아 전체적으로 현대 문법에 맞게 다듬고 빠진 글자들 역시 문맥에 맞게 임의로 추가했음을 밝힌다 - 필자 주)
"돌이켜 남한의 형편을 보면 그것도 아름답지 못하니 친일파의 블럭은 곳곳에 발호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의 세력은 군부 방면에까지 벌써 뿌리를 깊이 박혔다. 그들은 표창까지 받는다.
우리의 위대한 최고지도자 김구 주석은 도리어 그들의 비시(卑視)나 냉소를 받게 되며 심지어 그들의 모략적 중상으로 인하여 무식군배외자(無識軍排外者: 무식하게 외국을 배척하는 자), 국제형세역행자(國際形勢逆行者: 국제 형세를 거스르는 자) 등등의 모욕까지 당하고 있다.
김 주석도 이런 꼴을 당하시거든 그외의 애국자야 더 말할 것 있으랴. 모든 혼란과 분열도 그들이 제조하는 것이다. 애국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그 국가는 위기가 잠복하는 법이다.
비록 노둔(魯鈍)한 일민이라도 생명을 홍모(鴻毛: 기러기의 털만큼 아주 가벼움을 의미함)로 생각한지는 오랜지라. 감히 민충정공(민영환을 의미)과 같이 자문(自刎: 스스로 자신을 찔러 죽음)함으로써 애국동포의 정신을 환기하려 하며 할복까지 하였던 것이다."
즉 문일민은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온 조국의 현실이 38선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곳곳을 장악하면서 오히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온 애국자들이 모욕을 당하는 남한의 현실에 개탄하며 애국동포의 정신을 환기할 목적으로 의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포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민은 위대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들어 다시 죽을 길을 속히 찾기 위하여 더욱 굳게 결심하였는데 과연 우리가 독립을 완성할 길은 김 주석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김구 주석의 지도 아래 뭉치자. 김 주석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정로(正路)만을 걸어왔거니와 입국한 이후에도 반탁에 성공하였고 한국 문제를 UN에 상정시키는 데 또 성공하였다. 그는 이제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써 통일자주의 우리 정부를 수립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바 이것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단독 정부는 조국 분열과 외력(外力) 의존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방법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동포의 생존도 가망이 없는 까닭이다. 더구나 국제의 역량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집중한 때에 단정론을 주창하는 것은 결국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아니하랴."
문일민은 김구의 지도 아래 온 국민이 뭉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는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반탁 및 통일 정부 수립 노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칭 임시정부 시절 반(反) 한국독립당 세력이던 문일민이 해방 정국에서 한독당에 입당하게 된 까닭을 풀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문일민의 행보를 보면 사실 그는 반(反) 김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통일 정부 수립 노선에 공명하여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데서 추정해볼 수 있다시피, 문일민은 사사로운 인연이나 감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문일민의 통일 정부 수립 노선 지지는 근본적으로 그가 중국 망명 시절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부터 견지해왔던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실천하기 위한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의와 사상을 막론하고 한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공주의는 해방 후 통일 정부 수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