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민의 할복을 보도한 1947년 10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 "독립은 아직 멀고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지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조선일보
한편 문일민의 소지품 중에 가성조달(苛性曺達: 수산화나트륨, 일명 양잿물)이 있었다. 문일민의 의식이 회복되자 김응준은 내내 궁금했던 가성조달에 대해 물었다.
"이번 일에 제가 한 가지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그의 소지품 중에 가성조달(苛性曺達)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환자의 원기도 다소 회복이 되었으므로 어제야 비로소 가성조달에 대해 물어보니까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먼저 가성조달 세 개를 종이에 싸서 복용한 후 약 10분 뒤 할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가성조달을 복용한 후 할복을 그와 같이 심하게 하지 않았던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인데 위(胃)까지 할복을 했기 때문에 위 내용물과 같이 가성조달이 나오고 만 모양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우리나라가 완전독립할 때까지 활동하라고 하는데 이번 일은 천리(天理)에 어그러지는 일이라' 하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 김응준 인터뷰 中 (<현대일보> 1947.11.8)
요컨대 문일민은 죽기를 각오하고 거사 직전 양잿물까지 삼켜가며 할복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가른 배 사이로 양잿물이 도로 쏟아져나오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굳은 각오로 거사에 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앙청 할복은 '의거', 왜냐면
문일민의 할복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왜 하필 일본인들처럼 할복이냐'
'미군정에 가서 배를 가른다고 독립이 오나'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 우선 할복이 일본 고유의 문화라는 점부터 틀렸다. 할복은 전근대 조선에서도 종종 이뤄지던 일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 편영표는 청나라와의 화의(和議) 소식에 할복 자결했고, 이조참판 정온은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려 하자 역시 할복으로 항거했다. 이처럼 절의를 지키고 자신의 뜻을 호소하기 위해 할복을 한 사례는 한국 역사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사례다.
두 번째로 미군정에 가서 할복으로 독립을 호소한 방법이 무모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문일민은 미군정에 독립을 시켜달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미군정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관리였던 민영환 역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부당성을 알리고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할복이라는 수단을 택했다. 민영환의 할복 자결에 민심은 들끓었고 이는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계기가 됐다. 문일민 역시 민영환처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단결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일민의 할복은 '의거'로 불러야 마땅하며, 이를 두고 무모하다느니 일본 사무라이를 따라했다느니 하는 비판은 부당하다. 중앙청 할복 의거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반향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23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한성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경향신문>, <독립신보>, <대구시보>, <대동신문>, <현대일보>
조덕송, <民族 大드라마의 証言>(2), 《주간조선》, 1988.1.17
노성환, <할복: 거짓을 가르고 진심을 드러내다>, 민속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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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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