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 터견지동 우정총국 앞이 18세기 초중반까지 도화서가 있던 자리다. 이로 미루어 도화서가 인사동 탯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영천
관훈동이 인사동길 대부분이고, 정작 인사동은 일부에 불과하다. 18세기 중반까지 도화서가 있었던 조계사 앞 견지동도 인사동길 통칭이다. 도화서가 광교 근처로 이전했음에도, 그 존재는 인사동의 탯줄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자연스레 그림을 사고 팔았으며, 문방사우를 취급하는 점포가 있었으리라.
인사동길은 전통문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공간구조가 규정한 인지 특성이다. 전통과 문화는 익숙하나 어려운 말이다. 사전적 정의도 추상적이며 어려운 말투성이다. 이를 잇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제에서 이 길을 살피면, 인사동길은 분명 전통문화의 맥이 흐르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와르르 쏟아진
인사동의 변화도 강압된 근대화와 함께였다. 왕조를 지탱해 온 계급구조의 표면적 해체는 갑오개혁(1894)이었지만, 종이에 적힌 문구일 뿐 실질엔 이르지 못했다. 강제 병합 후속 조치인 '조선귀족령(1910)'으로 76명의 귀족이 탄생한다.
왕조시대 권력과 경제력을 거머쥐었으나 일제 귀족에 포함되지 못했거나 거부한 양반이, 이때부터 실질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강제된 계급 해체다. 부와 권력을 뒷받침하던 경제 기반도 같이 해체당한다.
북촌 양반은 절체절명이다. 당장 호구지책으로 집안 대대로 물려온 고서화 및 도자기, 공예품 등을 우선 처분한다. 북촌 배후지 인사동으로 진귀한 물품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부를 축적한 인사동 중인과 자본력을 갖춘 일본인이 이들 물건을 취급하기 시작한다.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추레한 역사가 만들어낸 강제된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