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시장황학동 공간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서울중앙시장 북측 입구 모습. 길 건너가 주방거리 및 중고시장 자리임.
이영천
개천을 건너자마자, 옛 모습이 오래된 사진으로 오버랩한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풍경을 비웃는 듯, 시민 아파트가 사라진 자리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아파트가 시선을 가린다. 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사라진 개천엔 거대한 'U자형 콘크리트'가 퍼 올린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고 있다.
마을 이름이 신비롭다. 신령스러운 노란(黃) 학(鶴)이 내려앉아서 황학동인가, 주변에 백학동이 있어 그리 불렀을까. 일제강점기 땔감과 숯을 거래하는 시탄시장(1923)을 열었고, 재래시장 기능을 없애려 공설시장(1941)을 개설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토지이용을 보인다.
인근에 귀국 동포와 월남민이 모여들어 판자촌을 형성하고, 군데군데 도시형 한옥이 자리 잡는다. 공설시장은 해방을 맞아 성동시장(1946)이었다 서울중앙시장(1962)으로 변모한다.
배고픔은 얼마나 처절한 고통이었을까? 삶을 찾아 도성 밖 개천 변에 자리했으나, 주린 배 채우기가 최우선이다. 살림살이와 가재 등속, 무엇이건 돈이 된다면 내다 팔아야 했다. 제방과 좁은 길은 돈 들이지 않고 점포를 열 수 있는 최적 조건이었다. 가히 중고품 노점 전성시대다. 해방 직후 성동공고가 자리(1946)하면서 랜드마크가 된다. 하지만 공간은 변천하는 시대의 단면으로, 아직도 잘린 상처 그대로다.
시대의 단면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황학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옥과 상점이 황폐화한다. 휴전되자, 판자촌이 다시 점령한다. 월남인과 유랑민, 먹고살 궁리로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다. 노점과 사창가, 고물상과 미곡상이 공간을 채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공구와 의복 등이 거래된다. 가난과 혼돈, 무질서가 난무했어도 삶의 가느다란 끈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고물상 일부가 골동품 전문점으로 변모한다. 덩달아 훔친 물건이 쉽게 거래되는 장물 처리시장이란 불명예도 따라붙는다. 가발용 머리카락이 주요 품목으로 부상하고, 미곡상이 중앙시장을 먹여 살린다.
1960년대 중반 빈번한 화재는 불행에도 불구하고, 공간구조를 바꾼 시작이었다. 화재가 사창가를 소멸시킨다. 사창가가 사라진 곳에 더 많은 상점과 노점이 고물과 골동품을 취급하며 공간을 채워 나간다.
공간은, 1967년 청계6가~청계8가의 복개로 개천이 빛을 잃음과 동시에 해체된다. 복개로 제방과 천변 도로를 점유하던 노점이 터전을 잃고, 주변 많은 판잣집과 도시형 한옥이 철거된다.
터전을 잃은 노점과 철거민을 위해 개천 양안에 7층의 각 12개 동 주상복합 삼일 시민 아파트(1969)가 들어서 경관마저 바꿔 버린다. 시민 아파트 뒷골목을 노점이 다시 점령한다. 골동품 상가가 이때 정식으로 인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