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부립도서관군산교육회가 운영하던 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된 공공도서관이었다.
국역 군산부사
'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가 직접 운영을 맡으면서, '군산부립도서관'으로 바뀐다. 도서관 운영 주체가 '민간'(군산교육회)에서 '공공'(군산부)으로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산부는 1932년 8월 도서관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이 이전한 곳은 군산부청사로 쓰던 건물로, 한일 강제병합 전부터 군산 행정의 중심이었다. 군산부립도서관이 있던 위치는, 지금의 옛 시청광장 자리다.
당시 군산부는 3262원의 예산을 들여 도서관 건물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 1층에는 특별관람실과 신문관람실, 서고를 배치하고, 2층에는 남자 열람실과 부인 열람실을 두었다. 도서관 면적은 105.5평이었다. 1933년 무렵 도서관장은 후지타 키쿠지(藤田菊次)다. 그가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원으로 입회한 기록이 <조선지도서관>에 남아 있다.
군산도서관과 군산부립도서관의 입지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군산 '원도심'에서 도서관이 차지한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공공도서관이 도심이 아닌 주변부에 지어진 걸 고려하면, 일제강점기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도서관 입지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접근성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 공공도서관 입지는 일제강점기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
군산부립도서관은 책을 12가지로 분류했고, 1934년 12월 현재 장서량은 8851권이었다. 군산부립도서관 장서는 군산부문고(2619권), 전북문고(824권), 교육회문고(4346권), 오쿠라문고(525권), 일반문고(527권)를 합쳐 출범했다. 군산부립도서관 출범 이전에 군산부에 군산도서관(교육회문고) 뿐 아니라 '작은 도서관'이 여럿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열람 문고'를 설치해서, 먼 지방까지 대출을 했다. 일제강점기 군산도서관은 호남 일대, 나아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서관 중 하나였다.
한편 1910년대 경기가 침체되자, 구마모토에게 농지를 맡겼던 여러 자본가는 그에게 농지를 팔았다. 구마모토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돈을 갚지 못하는 조선 농민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토지 브로커'로 출발한 구마모토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특수로, 쌀값과 땅값이 크게 오르자, 전라북도 최대 지주로 부상했다. 구마모토는 전 땅 주인의 빚을 떠안고, 새로 구입한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소유 토지를 늘렸다.
1931년 말 구마모토는 오쿠라지경(大倉地境) 농장으로부터 전북 옥구군 땅을 사들여 3천5백18정보에 달하는 대지주가 됐다. 1천만 평(3천5백여 ha)에 달했다는 그의 땅은, 여의도 면적(75만 평)의 13배에 달했다. '구마모토의 땅을 밟지 않고 군산 일대를 다니기란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이로부터 나왔다. 군산과 정읍에는 지금도 구마모토 농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마모토 농장'(熊本農場)에 소속된 소작인은, 1936년 당시 2687명에 달했다. 구마모토는 49명의 직원과 67명의 사음(마름)을 두고, 피라미드 구조로 소작인을 관리했다. 소작료를 비싸게 책정하고 가혹하게 운영했기 때문에,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은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었다.
- 2편
'그들의 도서관'은 어떻게 '우리 도서관'이 됐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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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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