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인 손진태한국 근현대 도서관 역사에서 <분류표>를 만든 사람 중 이름이 알려진 이가 세 명 있다. 손진태, 박봉석(조선공공도서관 도서 분류표), 고재창(해군사관학교 도서 분류표와 한국은행 도서 분류표)이다. 한국인이 만든 분류표 중 손진태가 만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분류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진태는 도요문고 사서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사서와 도서관장을 지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손진태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서울대의 전신) 법문학부는 진단학회 구성원이 교수진의 주축을 이뤘다. 진단학회에서 활동한 손진태가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울대 교수 시절 그는 국대안으로 인한 학생 동맹휴학과 위장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4월까지 6개월 동안, 그는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았다. 초대 문교부장관이 된 안호상의 요청으로 문교부 일을 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진태가 한국사와 <국사> 교과서를 만든 주역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손진태를 쓰다 소키치의 식민사관을 이어받은 '후식민사학자'라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다시 서울대로 복귀한 그는, 1949년 2월 18일부터 9월 7일까지 사범대 학장을 맡았다. 서울대 사범대 학장 시절 손진태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학도호국단을 반대하는 학생에 의해 그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5일 안암동 86-233번지 손진태 집에 침입한 괴한 3명이 권총을 3발 쏘았다. 그중 한 발이 손진태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더 이상 피해는 없었다. 그의 서울대 교수 생활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5월부터 9월까지는 서울대 문리대 학장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교직원에게 4개월 치 밀린 급여를 나눠주다가, 시간을 지체해서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에 숨어 있던 손진태는 1950년 9.28 수복 직전에 발각돼 납북됐다.
손진태는 해방 전에는 민속학자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역사학자로 활약했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가 민속학을 연구한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손진태의 연구 덕분에 '민속학'은 독자적인 과학과 학문 분야로 정립할 수 있었다. 이 대목이 민속학자로서 손진태가 가장 크게 공헌한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로 활동한 건 해방 이후부터지만, 손진태는 1934년 귀국한 후부터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손진태의 학문적 관심은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성립됐고, 우리 문화의 기초는 어떻게 구성됐는가'라는 점이었다.
손진태 이전에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가 있었지만, 그들은 민속학을 보조적인 분야로 간주했다. 조선 정신을 북돋는 방편 정도로 민속학을 생각했다. 민속학 분야에서 최남선과 이능화가 '시조'(始祖)에 해당한다면, 손진태는 민속학을 중흥시킨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다.
논문에서 기회 닿을 때마다 '인류학'을 언급한 손진태는 '인류학자'로 조명받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모두 대학 학문의 선구자로 손진태를 꼽는다는 점이다. 1989년 서울대 도서관은 유족으로부터 손진태 장서 2210권을 기증받아 '남창문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저작과 납북 경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