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천 이영춘 흉상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이영춘은, 군산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장으로 부임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그는, 한국인의 위생 개선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영춘 흉상은 군산간호대학교 교정에 있다.
백창민
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농장 안에 '진료소'(병원) 설립을 구상했다. 소작인이 건강해야 더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산은 조선 농민에 의한 소작 쟁의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농장주의 수탈이 가혹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모범농장으로 꼽힌 구마모토 농장은, 1930년대 초반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났다. 증산(增産)을 전제로 소작료를 높였기 때문에, 소작인은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을 통한 수탈', '수탈을 위한 증산'을 추구한 그의 농장 경영은 '구마모토형(熊本型) 지주(地主)'라고 불렸다.
구마모토 농장은 소작료도 비쌌지만, 증산을 위해 빌려준 비료에서 차익을 또 뗐다. 농장 방침을 어기면 욕설과 구타가 이어졌다. '모범농장'이라는 그의 농장 경영이, 얼마나 가혹한 착취에 기반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소작인에게 구마모토 농장은 '악덕농장'일 뿐이었다.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나자, 구마모토는 이를 무마할 생각으로 농장에 진료부와 자혜진료소 설립을 계획했다. 채찍과 당근을 함께 구상한 것이다. 이를 위해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돌볼 '조선인 의사'를 구했다. 구마모토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병리학을 가르치던 이영춘(李永春)에게 농장 의사 자리를 제안했다.
이영춘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명문인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에서 공부했다. 1935년에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구마모토의 제안을 받은 시점에 세브란스의전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경성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이영춘은, 고심 끝에 구마모토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 진료를 시작한 지 10년 되는 해에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해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선예방, 후진료'를 통해 질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영춘은, 연구소 설립을 통해 조선 농촌의 위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
이 제안을 구마모토가 받아들이면서, 이영춘은 경성을 떠나 구마모토 농장으로 향했다. 이영춘의 자혜진료소 의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얼마든지 의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그는, 군산에 와서 수많은 조선인을 돌봤다. 구마모토는 개정본장에 이어, 화호지장과 지경지장에도 진료소를 추가 설치했다. 이영춘과 함께, 세브란스의전 출신 김성환과 김경식이 진료를 담당했다.
구마모토 농장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해, 조선과 이영춘은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패전하자, 구마모토 리헤이는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구마모토 별장이 이영춘 가옥이 된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