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너머로 바라보는 충현박물관의 전경우리나라의 유일한 종갓집 박물관인 충현박물관은 평범한 주택가 속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주변의 고즈넉한 느낌과 울창한 나무들로 인해 시간여행을 온 듯 하다.
운민
400년 가까이 세월의 흐름을 버텨내었던 그 종갓집은 이제 박물관으로 바뀌어 일반인들도 쉽게 아름다운 전통 건축물의 품격을 누릴 수 있다.
단, 약간의 고민을 하게 하는 관문(?)이 있다. 박물관 치고 조금은 비싼 입장료가 걸린다. 과연 1만 원이란 거금을 내고 이곳에 들어가야 할까? 괜히 비싼 돈을 주고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루에 2, 3번 하는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 시간에 맞춰서 입장하기로 하고 들어가기 전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충현박물관 주변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기와담장이 박물관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건물의 높이가 꽤 있어 보였다. 게다가 적어도 몇 백 년의 나이가 된 듯한 울창한 고목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솟구쳐 있었다. 평범한 주택가에 이런 고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사실 자체에 경외감마저 들게 만든다. 대동법, 청백리 정도의 단편적인 텍스트만 가지고 있는 오리 이원익 선생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원익 선생은 본관이 전주로 태종의 12번째 아들인 익령군의 4대손이라고 한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전쟁, 반정 등의 격변기에도 꿋꿋이 자기 위치를 잘 지켜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왜란 뒤에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완화시켰다.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로 유명했고, 인조로부터 궤장과 집을 하사 받았다고 전해진다. 충현박물관 경내에 있는 관감당이 왕이 하사한 집이라고 하니 앞으로의 답사가 기대된다.
이제 역사의 문을 통과해서 이 종갓집의 비밀을 파헤치러 가 본다. 충현박물관의 경내는 왼쪽부터 전시관으로 활용되는 충현관과 최근까지 후손들이 거주했었던 종가와 인조 임금이 하사했다는 관감당과 뒤쪽의 사당인 오리 영우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우선 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종갓집 어른이 빨랫돌 수집에 관심이 많아서 박물관 주위에는 수많은 수집품들이 빽빽이 탑을 쌓을 정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충현박물관 자체가 자체 설립된 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원익 선생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거라고 하니 입장료가 비싼 게 이해되었다. 이원익 선생은 조선 중기 굵직한 역사 중심에 항상 서 있었다. 임진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등의 국난이 닥칠 때마다 재상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항정심을 유지했다. 그러기에 죽어서도 그 소중한 유품들이 잘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초상화와 그가 남긴 글씨는 물론 인조가 내렸던 어제 현판까지 다양한 물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제기류이다. 사기와 놋그릇은 물론 심지어 스테인리스 도금 유기그릇까지 볼 수 있었다.
갓 시집 온 13대 종부가 유기그릇을 닦아 사용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대고모님이 동대문에 나가 직접 사 온 그릇이라고 한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굵직한 양반집 안도 시대의 흐름을 나름 유연하게 발휘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