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 사진은 지난 1월 25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와 같은 흐름은 아베 신조 내각 때 더 두드러졌고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 들어서도 바뀌지 않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중국 압박을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착수했고, 이를 위한 4개국 협력체인 '쿼드'를 구성했다.
이 기조 위에서 스가 내각은 조 바이든 행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워싱턴D.C. 시각 12일 열린 쿼드 정상회담(화상)에서 스가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에도 '나쁜 친구' 중국에 대한 견제 의식이 드러났다.
이 성명은 "우리는 인도·태평양과 이를 넘어 안보와 번영을 증진하고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초하고 국제법에 기반한 질서 증진에 전념한다" "우리는 법치·항행 및 영공 비행의 자유, 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적 가치, 영토적 온전성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자유와 개방, 항행·비행의 자유는 남지나해(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명분이다. 민주적 가치, 영토적 온전성 등은 홍콩·타이완 등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1950년대에 아시아 일원의 입장을 견지하겠다던 일본은 여전히 '좋은 친구들'의 손을 꼭 쥔 채 '나쁜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국도 중국을 견제할 수 있으므로 일본이 미국·호주·인도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것 자체를 옳다 그르다 할 순 없다. 하지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동북아 역내에서 도덕적으로 불리한 일본이 외부 국가들과 합세해 역내 국가를 압박하면 일본의 위상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위험성에도 개의치 않고 '탈아' 노선을 한결같이 지향하니 일본의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배상인가, 경제협력인가
일본이 패망 후에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망령에 현혹되는 건 일본의 대외 정책이 미국의 세계전략과 연동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버금가는 요소로 고려할 만한 게 있다. 배상외교의 지지부진이 그것이다. 이웃과의 화해를 촉진하는 배상외교가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일본 외교를 헛돌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관계를 진정으로 정상화시키지 못했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 등을 통해 1945년 이전 문제를 털어버리고자 했지만,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실질적 조치를 결여했을 뿐 아니라 '돈 몇푼'으로 봉합하려 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한국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일본은 선심 쓰듯 금전을 쥐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발판으로 상대국 경제를 자국에 예속시키려 했다. 1965년 이후로 한국 경제가 일본에 더욱 긴밀히 예속된 것도 그런 전략이 실효를 거뒀음을 보여준다.
앞선 언급한 일본 <외교청서>에도 이런 의도가 반영됐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내각을 이끌 때 발간된 이 책은 배상문제의 기본원칙으로 "배상은 구상국(求償國)에 대한 우리나라의 의무 이행이지만, 이것을 단순한 의무 이행으로 끝내지 않고 동시에 구상국 경제의 회복 내지 발전에 기여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와의 경제관계 긴밀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제시했다. 배상하는 기회에 상대국 경제를 일본 경제와 긴밀히 연계시킨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