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6일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이 이날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의 세션1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버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부각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 암살된 뒤 영국에서 살다가 미얀마로 돌아간 그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50만 군중 앞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연설한 때가 서울 올림픽 개막 3주 전인 1988년 8월 26일이었다.
그 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을 당한 일, 그의 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총선에 승리하고도 집권하지 못한 일, 미국 등 서방세계가 미얀마 정부를 제재한 일, 그가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고도 시상식에 가지 못한 일.
10년을 흘러 2011년에 군부 출신 정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의 테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이 취임해 민주화를 제한적으로 추진한 일, 2015년 11월 총선에서 NLD가 압승을 거두고 2016년 3월부터 신정부를 이끈 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이 대학살을 당하는 가운데 아웅산 수치가 중국과 가깝게 지내자 2017년부터 세계 곳곳에서 그에 대한 시상이 취소된 일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1일 군부 쿠데타로 NLD 정부가 무너졌다.
미얀마에서 지체한 민주화
1988년 8월 8일 일어났다고 해서 '8888 항쟁'으로도 불리는 그해 민주화운동은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 1987년 한국 6월항쟁의 분위기를 잇는 동시에 1989년 중국 톈안먼(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준 일이었다고 평가된다.
2011년에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 발생한 재스민혁명(아랍의 봄)은 단기간에 신속하게 이 지역을 휩쓸었다. 그해 1월 5일(현지 시각 4일) 튀니지에서 발생한 혁명은 9일 뒤에 벤 알리 정권을 붕괴시키고 2월 11일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 성명으로 연결되고 2월 15일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했다. 3월에는 시리아 내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아랍권과 달리 동북아·동남아는 바다와 산악들로 막혀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 국민들이 일으킨 '나비의 날갯짓'이 동북아·동남아에 영향을 미치는 데 시간 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고 소셜미디어도 없었던 1980년대에는 값비싼 국제전화나 우표 붙은 편지가 아니고서는 각국 민중의 소통과 연대가 힘들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국제적 전파가 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민주화운동은 동유럽 민주화보다 약간 일찍 시작돼 세계 민중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됐다.
그런 정치적 격동의 결과로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데 비해, 미얀마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지체됐다. 진전은 분명히 있었지만, 군부의 파워가 여전히 압도적이다. 미얀마 민중의 역량도 강력하지만 군부의 파워 역시 만만치 않은 점이 미얀마 민주화를 지체시키고 있다.
왜? 문제는 경제
지난 30년간의 역사를 보면 미얀마 민중이 군부를 서서히 이기고 있는 게 확실하지만, 그 속도가 더디고 그로 인해 인명피해가 계속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고려해볼 수 있는 게 바로 경제민주화의 문제다.
한국 6월항쟁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민중의 경제력 역시 시민혁명 성공의 열쇠다. 6월항쟁에서 앞장선 세력은 재야 운동권과 학생들이지만, 은행원들로 대표되는 넥타이 부대 또는 중산층의 가세 역시 항쟁의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 국가권력들이 정권안보를 위해 중산층 동향에 특히 주목한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유사한 사례는 세계사와 한국사에도 매우 많다. 유럽에서 왕정체제가 몰락한 것이 부르주아의 경제력에 힘입었다는 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 정도전·조준 등으로 대표되는 중상류층 신진사대부들의 궐기에 힘입었다는 점, 16세기 조선에서 기득권층인 훈구파가 몰락한 것이 중소 지주층인 사림파의 투쟁에 힘입었다는 점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