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안병기
고부관아를 공격할 때까지만 해도 일반 농민들은 아직 혁명의 기운이 충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1차 봉기 때는 고부군 지역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용태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뒤늦게 조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장계(狀啓)를 올렸다.
1. 토지제도가 해이해진 점
2. 전운소(轉運所)가 부족미를 채우기 위하여 수탈한 점.
3. 유망(流亡)한 곳의 세를 받을 수 없었던 점.
4. 개간한 황무지에 과세한 점.
5. 미개간한 황무지에 땔감을 과세한 점.
6. 만석보에 과세한 점.
7. 팔왕보(八旺洑)에 과세한 점. (주석 16)
그 나름대로 민요의 원인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리석은 백성으로 끊임없이 지배세력의 수탈을 당하고도 힘이 없는 것을 한탄하거나 자신의 박복으로 돌리고 체념했던 호남의 항민(恒民)이, 지배층의 수탈에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순응적이었던 호남의 원민(怨民)이, 이제 정의감에 불타 개혁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호민(豪民)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도층의 행동은 처음부터 민란이나 민요(民擾)의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혁명의 서막이었다. 그 선두에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섰다. 이 날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인들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며, 역사에는 고딕체로 기록되고, 읽는 이들은 밑줄을 처가면서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1864년 3월 '혹세무민'과 '좌도난적'의 죄명으로 처형되고 나서 3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교조신원'과 같은 전면적인 동학행사로 보기는 어렵다. 고부군수의 야수적인 탐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고부 지역에서 혁명의 봉화가 타올랐을까.
고부군은 옛부터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 돼 있어서 부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들이 고부의 수령으로 가는 것을 열망하였다. 중앙권력의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만 고부군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군수가 자주 교체되고 임기를 채우고 떠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원자가 많아서 1년에 군수가 몇 차례 바뀌기도 하였다.
역대 수령들의 재임기간을 계산한다면 1573년 (선조6)부터 1755년 (영조31)까지 약 180년 동안에 133명의 군수들이 교체되어 재임기간이 1년 반 정도이고, 그 가운데서도 1628년 (인조6)에서 1644년 (인조22)까지 17년 동안에 17명의 수령이 교체되어 평균 1년도 채 못 된다. 이러한 이유를 읍 유생들은 풍수지리에 의한 부임역로(赴任歷路)에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 17)
주석
14> 최영년, 「동도문변(東徒問辨)」,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32쪽, 재인용.
15> 최영년, 앞의 책, 최현식, 앞의 책, 49쪽, 재인용.
16> 『고종실록』 갑오 (1894) 4월 24일자.
17> 최기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운동연구』, 175쪽, 서경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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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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