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이철영
김개남과 전봉준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어릴적 이웃마을에서 함께 살았고, 김개남의 중매로 전봉준의 큰 딸 전옥례는 지금실 마을의 강민복과 결혼해서 김개남과 같은 마을에서 살아서 두 사람은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동학에 입도하여 각각 포의 책임을 맡았기에 믿는 마음과 시국을 보는 눈이 유사했을 것이다. 전봉준의 아버지가 서당을 열어 훈장 노릇을 하여, 집안 누대로 사족(士族)이었던 김개남도 전창혁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의협심이 남달랐던 김개남은 전봉준 아버지의 참변에 분개하면서 같은 동학의 손화중ㆍ최경선과 더불어 전봉준을 위로하는 한편, 이참에 고부군수를 처단하고 봉기할 것을 제안하였다. 손화중은 고창의 동학 책임자이고 최경선은 태인 출신으로 김개남과 뜻을 같이하는 도인이었다.
역사의 큰 사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동학농민혁명의 거대한 물줄기에는 전창혁의 장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민란의 수준을 넘어서는 농민봉기의 제 조건이 무르익어가고 있었지만, 적어도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게 된 것은 '전창혁 상가'에서 점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역행위에 속했다. 주모자가 붙잡히면 능지처사되고 집안이 풍비박산당하는 중죄에 속했다. 조선후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의 주동자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죽어갔다. 해서 어지간히 담이 큰 인물이 아니고는 여간해서 봉기를 주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종 집권기에 왕권이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반역'에 대한 징치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최제우는 처형하고 이필제와 그 연루자들은 가차없이 죽였다. 전봉준의 아버지가 만석보의 수세를 경감해 달라고 관청에 호소했는데도 때려 죽인 것은, 유독 조병갑이 악독해서만이 아니고 당시 세도가들의 일반적인 행태였다. 따라서 봉기는 목숨을 내건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전창혁 상가에서 거사를 제기한 김개남은 도강 김씨 문중의 청년들을 동학에 입도시키고 그중에 24명이 접주의 임첩을 받았다. 한 문중에서 이같이 많은 접주가 나온 것은 도강 김씨가 유일했다.
이들은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의 깃발을 내걸고 '보은집회'가 열렸을 때 김개남의 주선으로 다수가 참여하고, 김개남은 이때에 최시형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을 받았고, 동시에 대접주의 임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손병희ㆍ손화중 등 19명도 함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김개남은 이보다 앞서 태인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