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모의탑
안병기
농민 60여 명은 1894년 1월 고부관아로 몰려가 군수 조병갑의 비행을 규탄하고 수세의 남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탐학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의 요구를 일축하고 오히려 여러 사람을 붙잡아 심한 매질을 하거나 쫒아냈다. 농민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고, 마침내 폭력으로 조병갑을 추방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치밀한 전략을 짰다. 농민들을 다수 동원하여 이전부터 구상해 온 농민혁명을 감행하여 광제창생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지방에서 훈장ㆍ약업 등을 하면서 주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던 터였다.
여러 지역에 믿을만한 동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봉기군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동학접주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봉기를 준비하여 왔다. 그리고 때를 놓치지 않고 결행하였다.
전봉준은 김개남ㆍ정익서ㆍ김도삼 등과 협의하여 2월 14일 밤 태인현 주산리의 동학 접주 최경선의 집에서 교도 중에서 건장한 사람 300여 명을 모으고 다시 답내면 마항리까지 30여 리의 길을 걸어서 전에 도모했던 700여 명의 농민과 합류하였다. 이 자리에서 지도부는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밝히고 관아로 쳐들어가 조병갑을 처단할 것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