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페이퍼하우스 속 정종미 화가 작품들
종로문화재단
서촌의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페이퍼하우스는 한옥 기와 아래로 넓게 펼쳐진 쇼윈도가 인상적이었다. 8년째 서촌의 한옥에서 살고 있는 정 교수는 한옥의 폭이 5m를 넘기는 경우는 드물다며 한옥 갤러리를 소개해주었다. 마치 한옥 전문가와도 같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 전통예술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닿을 수 있었다.
붓을 들자 운명이 느껴지다
1957년 대구 출생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흰 종이나 벽을 캔버스 삼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려댔다고 한다. 그림 솜씨가 범상치 않음을 인지한 사람들은 "나중에 너는 화가가 되겠다"라는 말을 예언처럼 쏟아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재능을 발견한 미술선생은 그녀에게 미술반 활동을 적극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고학년 선배들과 미술반에서 활동하면서 함께 수업을 받았지만, 주눅 드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미술대회에 나가는 족족 대상을 수상하면서 선배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제가 8남매에 일곱째예요. 학교에서는 예능 소질을 키워줘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부모님은 대구 전형적인 보수 성향이시다보니 딸자식을 시집만 보내면 되지 그런 생각이셨죠.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미술학원에 두어 달 정도 다닌 게 전부였지만, 중·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들 눈에 들어 미술반 들어갔고, 사생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어요."
많은 상을 휩쓸면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반응은 한결같이 차가웠다. 그 탓에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자연스럽게 미술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잠시 방황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결국 가족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꿈에 지지를 표하면서 진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방학 때 상경해 미술학원 다니기를 두 차례 반복한 끝에 서울대 미대에 합격한다.
"그때는 회화과였고 3학년이 되면 동·서양으로 나뉘었어요. 2학년이 되어서야 붓을 처음 들었는데 동양화 붓을 처음 만진 순간 딱 느낌이 오더군요. '아, 내가 전생에 이걸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대요. '이게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보통은 서양화가 더 인기가 있었는데 동양화를 선택했고 수묵은 수묵대로 채색은 채색대로 열심히 그렸어요."
대학에서도 그녀의 재능은 단연 돋보였다. 경마장을 찾아가 열심히 보고 그린 300호짜리 말 그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실감나게 잘 그렸다는 남정 박노수 선생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재능뿐만 아니라, 그녀의 성실한 수업 태도는 교수들의 칭찬을 받기에 충분했다.
사군자 수업시간이 오면, 그녀는 담요를 깨끗이 깔고, 그 위에 인사동에서 산 자황, 벼루와 문진을 정성스럽게 정돈해 놓곤 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테이블은 그녀의 정갈한 마음 바탕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강의는 일랑 이종상 선생의 수업이었다.
"일랑 선생님이 참 열정적으로 강의하셨어요. 어떤 날은 지방에 스케치를 가셨다가 멜빵 청바지를 입고 바로 학교로 오신 적도 있었는데 어린 학생에게도 그런 생동감 있는 수업은 참 좋았었죠. 채색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셨고요. 특히 일랑 선생님이 해주신 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의식이 열렸던 것 같아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신 분이시죠."
당시 교수들은 채색은 곧 왜색이라며 만류했다. 전쟁과 식민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색깔 있는 그림은 자꾸만 일본하고 연관 짓는 터에 학생들도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고구려벽화도 채색일진데, 왜 금하시는지 의문을 갖게 된 거죠. 결국 그때 100호짜리 채색화를 완성한 것은 저뿐이었어요. 저의 첫 개인전 때 일랑 선생님도 10년 강의하시면서 채색화를 완성한 학생은 저밖에 없었다고 하셨죠. 지금은 그때 채색을 못하게 하셨던 분들께 도리어 감사해요. 저한테 화두를 던져주신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