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미 한국화가
종로문화재단
당시 미술사는 주로 표현기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그림을 이루는 재료기법, 물질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 교수는 한국채색화가 발전하려면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연구하고 실험하며, 그동안 수집한 자료와 데이터를 번역하고 적용했던 8년의 시간 끝에 그녀의 저서인 <우리그림의 색과 칠>이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림의 근본은 '물질'이거든요. 그래서 재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때문에 콩즙, 연지, 황벽, 황토, 쪽 오리나무 등 다양한 자연 재료들을 연구했죠. 콩즙 같은 경우는 일랑 이종상 선생님이 대학교 3학년 때 수업 시간에 말씀을 하셔서 알게 됐어요.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장판지 같은 그림을 깔고 굿을 하는데, 물을 막 뿌리고 그래도 멀쩡하다고 하신 이야기가 흥미로웠죠.
민간에서는 소를 한 마리 잡아야 아교(阿膠)가 나오니까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색제(展色劑)로 콩즙을 사용한 거예요. 그 이야기가 떠올라 콩즙을 써봐야겠다 싶었어요. 시행착오를 많이 거쳐서 장판지 같은 느낌의 그림을 완성했는데, 전시회에 오신 분들이 그림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오랫동안 장판지 생활을 해온 우리의 DNA 안에 아직도 이런 것이 남아 있다는 증표죠."
정 교수는 그런 DNA 속 감성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자존감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연 재료는 시간이 축적되면서 그 색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가장 황홀했던 색으로 쪽과 황벽의 푸른색과 노란색을 꼽는 그녀는 색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밤을 새가며 작업에 매진할 때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여성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작품을 그리다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한지에 입히고 여기에 여성성을 더해 탄생한 '종이부인' 시리즈, 그리고 그에 실존 인물을 표현한 '역사 속의 종이부인'과 하나의 의례행위라고 할 수 있는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 시리즈는 정 교수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을 관찰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인한 포용력과 인내심, 관용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됐어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생각해보니 '모든 여성은 내면에 부처를 지니고 있구나.' 하고 결론짓게 되었죠.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한지가 가장 질기면서도 가장 부드러운 최고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이 점이 한국의 여성성과 흡사해서 작품에 활용하게 됐어요. 명성황후,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신사임당 등을 표현한 '역사 속의 종이부인'에 힘겨운 삶을 살다 간 여성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鎭魂)의 의미를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