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상 화백
종로구청
고구려 문화에 대한 오랜 연구와 남다른 집념은 그가 국내를 대표하는 영정화가로서 우뚝 선 기반이 되어 주었다. 1977년에 맡아 그린 광개토대왕의 국가 표준영정도 그의 오랜 노력이 빛을 발한 결과물이었다.
그 이후로 신라의 승려인 원효대사의 표준영정을 그려내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그의 대표 사상인 기신론을 공부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인물의 혼이 담겨 있다는 평가가 따르는 것은 본질과 깊이를 담고자 하는 그의 세계관이 그림 안에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정화의 전문가로 일컬어지면서 1977년 5000원권 지폐의 도안이 바뀌는 시기에 처음으로 화폐영정 제작을 담당하게 된다.
본래는 순종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화원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 선생이 그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김 선생이 병환으로 그릴 수 없게 되면서 그를 추천한 덕분이었다. 통상 원로들이 맡았던 화폐영정 제작을 불과 서른일곱 살의 청년 작가가 맡았으니, 당시에는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꼭 31년이 지난 뒤에는 5만 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화폐영정 제작을 맡으면서 모자(母子)를 그린 화가로 다시금 유명세를 치른다.
"신사임당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생각했어요. 귀하게 자라신 분이 저희를 위해서 광주리장사를 하시며 고생하셨던 그때를 떠올렸죠. 우리나라 최고액 권에 신사임당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야 해요. 보통 화폐에 여자가 들어가려면,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열사 잔다르크 같은 인물이 아니면 힘들거든요. 외국에서는 존경스럽다고들 해요. 얼마나 문화적인 국민이기에 자식들을 잘 기르고, 자기 세계를 잘 이뤄낸 여류화가를 고액권에 넣느냐고요. 신사임당의 영정을 넣기로 결정했다는 걸 듣고, '우리가 진정 문화민족이구나!' 하는 긍지를 느꼈죠."
화폐작가는 단순히 그림만 잘 그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이력과 금전관계, 친인척 재산까지 모두 조사하는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거친 뒤에 선정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화폐영정을 그렸지만, 그가 청빈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도 화폐작가로서의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00원권을 그리신 운보 김기창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너의 마음이 곧 돈의 마음이라고요. 사람들은 돈에 마음이 없는 줄 알지만, 돈에도 마음이 있고, 천리안이 있어 아무나 따라가지 않는다셨죠.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걸 그린 화가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물욕만 앞선 사람에게는 절대 돈이 따라가지 않아요."
이 화백은 '일랑(一浪)'이라는 호처럼,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물결을 일으키면서, 한국 현대미술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여해왔다. 그의 작품에 담겨 있는 깊이 있는 가치와 세계관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 우리의 역사와 미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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