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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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하노이 합의에 실패하면서, 아무래도 미국보다는 북한이 좀더 아쉬운 입장에 놓이게 됐다. 관계단절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북한은 경제적 곤란을 겪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과 동병상련을 겪은 나라들이 있다. 이 나라들도 미국 때문에 애를 많이 태웠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손상시키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체제)'를 흠집냈다는 점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어떤 형태로든 성조기의 위신을 손상시켰지만, 이 3개국은 북한과 더불어 가장 두드러지게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린 바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흔든 3개국과 미국의 보복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연합해 미국과 싸운 결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북베트남(지금의 베트남)은 베트남전쟁(1960~1975년) 중인 1964년부터 미국과 격돌한 끝에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미국에 대한 승리를 확정지었다. 북베트남은 미군을 철수시킨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을 멸망시켰다.
한편,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손상시킨 나라가 있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 맞은편의 쿠바가 바로 그 나라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혁명(1959년) 이래, 이 나라는 미국 바로 코앞에서 공산주의를 유지하며 반미노선을 견지했다.
그런데 세 나라는 총체적 국력 면에서는 미국을 능가하지 못했다. 베트남이 미국을 꺾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 지형을 벗어난 데서 싸웠다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홈팀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군(중공군)이 바로 옆 한반도가 아니라 미국까지 원정을 갔다면, 무승부도 내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3개국은 분명히 전체 국력에서는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존 세계 최강을 무너트리지 못하고 상처를 내는 데 그쳤으므로 3개국은 보복을 피하기 힘들었다. 특히 중국은 핵개발 과정에서 케네디 행정부(1960~1963년)의 침공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2011년에 <미국사 연구> 제33권에 실린 김정배 신라대 연구교수의 논문 '케네디 행정부의 중국정책 그리고 냉전체제'는 "(미국이) 중국의 핵무기 보유를 막기 위해 고려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이고 다른 하나는 핵시설에 대한 예방적 혹은 선제 타격이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세 나라가 받은 공통적인 보복은 경제 제제다. 이들은 한결같이 무역제재를 받았다. 이런 속에서 이 나라들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국에 치욕을 준 이 나라들에 대해 미국은 쉽게 문호를 열지 않았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기 전만 해도,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을 포함한 3개국은 경제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자국을 망신시킨 데다가 경제적 가치마저 높지 않았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세 나라는 결국 미국과의 수교에 성공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결과였다. 미국이 입장을 바꾼 데는, 어느 정도는 절박함이라고 표현할 만한 사정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