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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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하자 린든 존슨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나포를 불법 납치로 간주하고 핵전쟁을 가능케 하는 대통령 명령을 발포했다. 또 공군 예비역 1만 5천 명에게 전쟁 동원령을 내리고 엔터프라이즈호 등 항공모함 3척을 급파해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전투기 372대도 출격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심지어 원산만 폭격까지 공언했다.
이 사태는 그 해 12월 종료됐다. 북한군 대 유엔군의 협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미국은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약속했으며, 북한은 선원 82명과 유해 1구의 송환을 약속했다. 푸에블로호 선체는 반환되지 않았다. 정성윤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연구교수의 논문 '1차 사료를 통한 미북 간 협상과정 분석: 1968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중심으로'는 협상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북한의 경우 협상 초기부터 그들이 줄곧 주장하였던 간첩행위의 인정과 영해 침범에 대한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한 보장 요구에서 변동이 없었다.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요구나 경제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무력시위를 통한 군사적 압박으로 시작하여, 조건부 사과 표명, 북한의 요구 수용 직후 발뺌하기와 같은 변덕스러운 협상 전략으로 사태에 대응하였다. ······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어떠한 이니셔티브도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투사하지 못하였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행한 <전략연구> 제15권 제2호.
미국이 국력을 협상에 투영하지 못한 데는 아무래도 베트남전쟁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제1요건). 푸에블로호 나포 7일 뒤인 1월 30일, 북베트남(현재의 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전위부대)이 미국과 남베트남을 상대로 대반격을 개시했다(구정 대공세). 이 해는 1월 30일이 구정 즉 음력 1월 1일이었다. 구정 대공세와 함께 미국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서 미국이 전쟁 위협을 가하자, 북한은 오히려 긴장감을 더 고조시키며 미국을 당황케 만들었다(제2요건).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1968년 3월 4일 협상장에서 북한 대표 박청국 장군은 "귀국이 지금과 같은 입장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미국 정부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운명에 관심이 없고, 이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따라서 우리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라고 말했다.
올해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한 것처럼, 박정국도 '새로운 길'을 암시하며 미국을 위협했다. '빈말'로 전쟁을 공언했던 미국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상 명분을 쥐었다는 점도 북한을 유리하게 만들었다(제3요건). 미국은 북한이 불법 납치를 한 것처럼 선전했지만, 막상 협상 테이블에서는 북한의 기세를 꺾기 힘들었다. 미국이 유책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유사한 일은 이듬해에도 벌어졌다. 재발 방지를 약속한 미국은 이번에는 해상이 아닌 공중으로 북한을 침범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김일성 생일인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전자정찰기 EC-121기를 보내 북한 영공을 침범했다. 그러자 긴급 발진한 미그 21기가 공대공 미사일로 EC-121기를 격추했다. 탑승했던 해군·해병 31명 전원이 익사했다.
이 사건은 푸에블로호 사건과 유사하게 전개됐다. 이번에도 미국이 해상봉쇄를 단행하고 핵전쟁 위협을 가했지만, 이때도 역시 미국이 재발 방지를 서면으로 약속한 뒤 물러섰다.
당시에도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시달리고 있었다(제1요건). 또 북한은 여전히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미국을 당황시켰다(제2요건). 미국이 핵공격 위협을 가하자, 군사분계선 부근을 비행하던 미군 헬기를 격추했다. 이에 더해 제3요건도 충족됐다. 북한은 EC-121기의 영공 침범을 근거로 '명분'을 장악했다.
제네바 합의와 6자회담은 왜 어정쩡하게 끝났나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될 때 북한의 협상력이 높아진다는 점은 1990년대 이후의 북미협상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났다. 소련이 해체되고 미국이 걸프전에 승리해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평화)가 일시적으로 강화된 1993년 3월 발생한 제1차 북미 핵위기가 어정쩡한 제네바 합의(1994.10.21)로 끝난 사실이 그 점을 역설한다.
제네바 합의 체결은, 전쟁 위협을 가하는 미국을 물러서게 했으며 양국관계 정상화를 약속했다는 점에서는 북한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제법적 효력 없는 합의를 체결하고 끝냈다는 점에서는 승리라고 보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제네바 합의'로 번역하지만, 영문으로는 합의(areement)가 아니라 '합의 대강' 혹은 '합의 골자'를 뜻하는 agreed framework에 불과했다. 미국이 어정쩡한 합의를 해주고 물러났던 것이다.
북한이 그 이전의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데는 미국의 대외관계가 덜 어수선했다는 점(제1요건 결여)과 더불어, 핵위기가 발생한 지 1년 반 정도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긴장감이 상당히 이완됐다는 점(제2요건 결여)도 크게 작용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최초의 긴장감이 크게 떨어지고, 이로 인해 북한이 미국을 심리적 코너로 몰아붙일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협상 쌍방이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되면, 아무래도 전체 역량이 우수한 쪽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마련이다. 협상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미국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에 북한이 명분을 쥐지 못했다는 점(제3요건 결여)도 크게 작용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등과 달리 핵위기 때부터는 비핵화가 핵심 의제가 됐다. 북한 핵의 불법성을 전제하는 자리에서 북한이 명분을 쥘 수는 없었다. 이전과 달리 북한이 도덕적 명분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대북 제재의 불법성을 핵심 의제로 해서 회담이 열렸다면 북한이 도덕적 명분을 가질 수 있었지만, 비핵화가 핵심 의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힘들었다.
3대 요건이 없으면 북한의 협상력이 약해진다는 점은, 6자회담이 어정쩡하게 끝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200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북미 핵위기를 해결하고자 2003년부터 6년간 회담이 진행되면서 초기의 긴장감이 크게 이완됐다. 거기다가 비핵화가 핵심 의제가 되다 보니, 북한이 미국을 몰아붙일 도덕적 무기를 갖기 힘들게 됐다. 미국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북한 입장에서도 6자회담은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회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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