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연수생 출국전 교육살라스는 인도네시아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출국 전에 남자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살라스
신분증 압류, 강제 적립, 외출 금지...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
1997년 여름에 한국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여권을 만들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공항에서 연수생 관리업체 직원이 여권을 갖고 단체로 출국시켰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신분증을 직접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압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월급은 매월 4~5만 원을 용돈으로 준 뒤, 회사에서 강제 적립해 버렸다.
목돈 마련하고 귀국하라고 적립하는 거라 했지만, 업체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회사에서 통장을 압류했기 때문에 하루 14~15시간을 일하면서도 실제 급여를 확인해 본 적이 없다. 토요일은 당연했고, 일요일도 잔업 하는 날이 많았다.
회사는 청주에 있는 방직공장이었다. 공장 앞에 큰 길이 있었고, 공장 뒤로 식당과 무슨 '실'이라고 하는 건물들이 있었고, 맨 뒤에 3층짜리 기숙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인권침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작업환경은 방직 기계가 돌아가던 공장을 나오면 귀가 멍할 정도로 소음이 심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한 방에 여덟 명이 지냈던 기숙사는 이제껏 봐왔던 어떤 방보다 크고 아늑했다. 같이 입국한 인도네시아 연수생들은 방 세 개를 썼는데, 성질 사나운 사감이 있을 때 말고는 오순도순 고향 이야기를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자수도 놓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외부 출입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회사에서 딱 한 번 단체로 외출했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곳이었다. 인도네시아도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했기 때문에 그곳이 인상 깊었다.
쉬는 날도 많지 않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지만 3년만 참고 귀국하면 빚도 갚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귀국하면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는 산업체 야간학교에 다니는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있었다. 더불어 군대 대신에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던 남자들도 많았다. 그때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야간학교들이 거의 사라질 시기였다. 산업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부모가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하면서 배우는 삶을 강요받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이 참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공장 일을 마치고 작업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다짐했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도 저렇게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도 귀국하면 반드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 그 각오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20년 전 일했던 회사 이름은 까먹었지만, '이영주'라는 중학생 아이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아이가 참 착했다. 나에게 잘 해 줬고 잘 웃는 아이였다. 보고 싶다.
20년 전 한국에서 마음먹었던 각오대로 대만에서 이주노동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서 SBMI에서 활동가로 일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방송통신대학을 통해 법학 학사도 받았다. 미국무부 인신매매 방지 올해의 영웅으로 선정된 뒤, 독일과 호주에서 대학원 과정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초청도 받았다. 영어가 서툰 부분도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수 없어서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공부를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