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 짬뽕이 식사로 나왔는데 면만 먹고 국물을 남기면 더 맛있게 먹게 해 준다기에 저는 시키는 대로 국물은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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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짜장면을 시키고 짬뽕을 먹은 날이었다. 주문 사고는 아니었다. 김상원씨는 짬뽕을 앞에 두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끝내는 한술도 뜨지 못하고 변상철 시민기자에게 "바꿔 먹자"라고 했다.
변 시민기자는 군소리하지 않았다.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서 이러는 줄 알았다. 중국집에 오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일은 끝났으나 제2의, 제3의 이근안은 30년이 가까이 김씨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지난 2010년 4월,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변상철 시민기자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있을 때다. 그가 기억하는 김상원씨는 이랬다.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왔다. 거칠고 투박한 사람이었다. 감방 동기가 소개해줬다며, 작은 종이상자를 들고 왔다. 거기엔 지난 1982년 있었던 국가폭력에 관한 조사기록이 들어 있었다."두 번째 만남에선 짬뽕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놨다.
"수사관들이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에는 원산포격으로 대기시켜 놓고 이 사람, 저 사람 들어오면 발로 짓이기고 각목으로 구타를 해요. 뭐 그냥 샌드백이 된 기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 짬뽕이 식사로 나왔는데 면만 먹고 국물을 남기면 더 맛있게 먹게 해준다기에 저는 시키는 대로 국물은 남겼습니다. 밥이라도 말아주는 줄 알았죠.
(중략) 홍 계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이제 시작하지'라고 하자, 수사관 김종O, 이한O, 안영O 등이 들어왔어요. (중략) 얼굴에 큰 수건을 덮더니 물 주전자에 짬뽕 국물을 섞어서 코 주위에 물을 부었어요."
짬뽕은 고문 도구였다. 김상원씨에겐 흔하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답답했다. 억울한 사연은 알겠는데, 풀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접수도 안 된 사건을 조사할 수도 없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길이 보였다. 변 시민기자는 '직권조사'란 단어를 발견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서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원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실규명사건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진실규명이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때에는 이를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제22조)김씨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변 시민기자는 "최선을 다해 보겠다"라고 했던 게 가슴에 남았다. 팀장을 만나고 국장을 찾아가 설득했다. 위원들에게 부탁했다. 조사라도 할 수 있게 됐다.
조사결과, 진실은 이랬다. 고문과 협박에 의한 허위자백. 하지만 직권조사 결정은 기각됐다. 김씨는 조사결과보고서라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걸 들고 법원으로 달려가 재심을 신청했다. 지난 2013년, 김씨는 30년간 자신을 옭아맸던 '간첩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법정을 나오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얼싸안고 울었다.
그래서다. 이젠, 변상철 시민기자는 짬뽕을 보면, 김상원씨가 떠오른다. 두 사람이 음식을 바꿔 먹던 날이 생각난다. 이날 김씨는 한 장의 사진도 보여줬다. 거기엔 그가 고향 경북 예천의 시골 마을 길가에 내건 현수막이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1983년 8월 안기부에 끌려가 불법구금과 온갖 구타 및 고문으로 조작하여 간첩 누명 썼던 암천 김성환의 셋째 김상원이 2013년 12월 3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형사부에서 재심하여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김상원씨는 짜장면을 앞에 두고 즐거워했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짬뽕을 먹으며, 통쾌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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