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부산공장에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1차 희망버스가 도착했다. 두 어른은 맨 앞줄에 서서 부당한 대규모 정리해고를 반대했다.
노순택
"백기완, 문정현이 담장을 넘었대!"2011년, 희망버스라고 너도 들어는 봤을 거야. 한진중공업의 부당한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발랄한 연대였지. 아빠는 1차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 부산공장에 갔단다.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도 오셨지.
갑자기 누군가 외쳤어. 공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곧바로 담장 밑으로 사다리가 내려왔지. 하지만 아빤 선뜻 담장을 넘을 수 없었어. 겁이 났던 것 같아. 그때 아빠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으로 집행유예기간이라서 잘못하면 다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거든. 몸조심해야 할 때였지.
"이러다 또, 구속되는 게 아닐까?"두려운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 부산으로 내려오는 희망버스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쌍용차 투쟁 때 어려워지니까 아무도 공장으로 들어와서 싸우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이날 투쟁에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 함께 싸우겠다 말했는데도 몸이 굳어버렸어.
사다리를 타고 담장을 넘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애먼 줄담배만 피우며 망설였어. 그때, 그 소리를 들은 거야.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이 담장을 넘었다'고. 뭐에 홀린 것처럼 사다리를 타고 담장에 올랐어. 용기가 생겼거든. 아빠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선들 중에 '두려움'이라는 선 하나가 툭하고 끊긴 느낌이었어.
이 일이 있고부터 삶의 궤적이 조금 바뀌었어. 아빠는 무섭고 망설여지는 순간에도 뒤로 숨지 않고 맨 앞자리에 섰어. 결국, 아빠의 지난 몇 년간의 불법행위들(?) 뒤에는 두 어른이 있었던 거지. 덕분에 경찰서 들락거리는 전문시위꾼 취급을 받게 됐지만 주눅 들진 않았어. 후회도 없고. 그분들은 모르겠지만 아빠는 이렇게 든든한 뒷배를 얻었으니까.
"제발 좀 살려주세요!"너도 알지. 김정우 아저씨. 2012년 서울 대한문에 분향소를 만들고 기자회견을 하는데, 이 말을 하고 정우 아저씨가 서럽게 우는 거야.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의 죽음이 멈추질 않았거든. 그때 지부장을 맡고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어. 사회원로 분들도 곁을 지켜 주시다가 눈물을 흘렸지. 취재 왔던 기자들까지 울었으니 어땠겠어. 그야말로 눈물바다였지. 근데, 적막을 깨고 이런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어.
"김정우! 울지 말어. 어깨 펴!"백기완 선생님이셨어. 순간, 약해진 모습에 다들 뜨끔했지. 하지만 이 말을 하고 백 선생님도 우셨단다. 호통 칠 때는 언제고 눈물을 훔치셨지. 이날 기자회견에서 모인 눈물의 힘이 쌍용차 투쟁을 이끌고 갔다고 아빠는 생각해. 공장에서 쫓겨나고, 누구 하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기막히고 서러운 날들이었거든. 포기하고 싶어도, 물러서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단다. 서로의 울음이 벼랑 끝에서 잡은 동아줄 같았어.
그 사이 문 신부님은 제주 강정에 계셨어. 주민동의도 없이 해군기지를 강행하는 정부에 맞서 싸움을 이어갔지. 각자 싸워선 희망이 안 보인다고 쌍용차(S) 해고자와 강정(K) 마을주민, 그리고 용산(Y) 유가족이 주축이 돼서 큰 싸움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셨어.
신부님이 종자돈도 내놓으셨단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수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이 모여 기획단을 꾸린 게 'SKY연대'였단다. 뭘 했냐고? 장장 한 달간 걸었어. 제주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서로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지. 고행 길이었단다. 하지만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했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기나긴 투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 자신을 껴안아주는 기회였으니까. 아빠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 다리가 아프셨던 신부님이 휠체어를 타고 우리와 함께 걷던 그 길을.
딸! 며칠 전 너와 함께 영화 '택시운전사'를 봤잖아? 너는 군인들이 광주시민을 때리고 죽이는 장면마다 눈을 가렸지. 아빠 손을 꼭 잡으면서 너무 무섭고 슬프다며,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물었지.
아빠도 너의 손을 꼭 잡았어. 군부독재정권에 맞서 광주역에 사람들이 모인 장면에서.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모여 주먹밥을 나누고, 악기를 두드리고, 춤을 추는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그들이 며칠 뒤 어떤 폭력과 죽음과 이별을 맞이하는지. 영화가 끝나고 광주정신을 되짚어봤단다. 기념식 때 내놓는 정치적 수사나, 때 되면 TV에서 특집 편성하는 흘러간 옛 이야기는 아닐 거야. 폭력과 죽음에 맞선 사람들에게 서로의 손과 마음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광주정신이 아닐까? 그들 곁에서 주먹밥을 나누고, 악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광주정신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국가사업이라고, 경제가 어렵다고, 더 많은 이윤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와 주민들이 곳곳에서 쫓겨난단다. 공권력을 동원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오늘의 대한민국. 권력 유지를 위해 총칼로 광주사람들 죽인 어제의 대한민국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아빠는 잘 모르겠어.
'빨갱이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 국가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언론보도가 80년 광주에서만 일어났던 일일까? 강정에서, 용산에서, 쌍용차에서, 밀양에서, 성주에서, 그리고 세월호에서 비슷한 언론보도가 이어졌지. 알바노동자들이, 청소노동자들이, 급식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행동에 나설 때도 똑같은 프레임을 덧씌웠어.
딸아, 기억하렴! 두 어른의 삶을
▲두 분은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비가 와도, 경찰에 가로 막혀도, 쓰레기차 위로 쫓겨 올라가서도 외치고 또 외치길 멈추지 않았다.
정택용(좌), 노순택(우)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은 평생 투쟁 한복판에 서있었단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건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다들 변하잖아. 누군가는 포기하고, 누군가는 시류에 편승해 스스로를 합리화해. 결국 욕망 때문에 변절하는데, 세상 탓을 하거나 사람 핑계를 대지. 평생 싸움을 이어가는 것도 대단하지만 내 욕망을 세상의 변화로 방향을 잡은 두 어른이 아빠 같은 사람에겐 더 신기하단다.
두 어른이라고 유혹이 없었을까? 두려움이 없었을까?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해. 하지만 망설이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나아가셨지. 그렇게 투쟁의 길을 걸어오신 두 어른을 보면, 아빠는 가끔 슬퍼.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아스팔트 위에서 천형(天形) 같은 삶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가슴이 먹먹해.
딸아! 기억해줄래? 이 땅에 두 어른이 있단다. 백기완 문정현은 또 다른 광주에 있던 사람들과 밥을 나누고 노래를 부로고 춤을 추던 사람이란다. 누가 불러주거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가끔 들리는 게 아니라 평등과 평화를 위해 길 위를 지켰던 사람이고, 그 싸움의 운전대를 자임했던 사람들이야. 자신의 삶이 찢기고 멍들어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지. 그런 평생의 발자국들이 사람들에게 이어졌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투쟁의 길을 만들어 가고 있어.
너도 언젠가 두 어른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길 바랄께.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순간이오면, 두 어른을 떠올려보렴. 두 분이 만들어 온 길 위의 밥과 춤과 노래를 생각해보렴. 두 분의 이야기를 네가 기억한다면 너에게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실 꺼야.
▲<두 어른>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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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복직자. 현재 쌍용차지부 조합원. 훌륭한 옆지기와 살고 있는 세아이의 아빠.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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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른'이 담장을 넘는 순간, 아빠의 두려움도 사라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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