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故 이소선 어머니 1주년 추모제'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정택용
헤아려보니 그의 이름을 안 지 꼭 30년이다. 그때 나는 어렸다.
얼굴을 본 건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었다. 그때도 물론 어렸지만, 성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거리에서 보았다. 처음 사진기를 들이댄 건 길어야 20년, 짧다면 15년 전이리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인상은 편치 않았다. 사진기를 둘러맨 자들이 잠시 앞을 가릴라치면 "야, 이놈들아!"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불편했다. 나를 지칭한 나무람이 아니었대도 모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진기를 든 양아치이거나 훼방꾼인가. 나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3년 전이었다. 해고됐다 복직한 노동자 김수억이 다시 받은 첫 월급을 털어 '스승의 날'을 마련하고 싶다 말하고, 함께하자는 손들이 웅성댈 때 사진쟁이들에게 요청이 날아왔다. 그에 관한 사진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기꺼이 도왔지만 그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그의 눈물을 보았다. 그날 밤, 노동자 김수억도 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눈물로 털어놨다. 싫던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이 내 작업의 '주인공'이 되었고, 어쩌다보니 가까운 친구들이 되었고, 어쩌다보니 비정규직-해고노동자들의 연대쉼터 '꿀잠'을 짓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마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백기완은 우리 편이었다. 집 짓는 일을 크게 반겼다. 나와 친구들이 그의 삶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로 작당모의하고 붓글씨를 써 달라 했을 땐 단호했다. 거절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도 했다.
끈질김을 누가 가르쳤나. 그가 가르친 것이었다. 우린 거듭 찾아가 늙은 당신을 괴롭혔고, 끝내 그가 졌다. 약속한 서른여섯 점의 붓글씨를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는지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당신의 삶을 새긴 붓글씨를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한 푼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되려 밥을 얻어먹었다. 꿀잠, 지금 그 집이 지어지고 있다.
지난겨울, 여든다섯의 당신은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석하며 하루 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 했다.
"늙은 내가 오줌이 마려워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건, 여럿을 힘들게 하는 일이잖아."백기완. 나는 이제 그를 사랑한다. 그를 여전히 거리에 머물게 하는 이 시대가 몹시도 불편하다.
분노한 사제 분노한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