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메> 편집실. 1972년 12월로 앞열 왼쪽부터 박정헌(고2), 허남헌 선생님, 박도, 김무길(고1). 뒷열 왼쪽 이윤복(중2), 황윤석(중1) 등이다.
박도
그해 10월 3일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다섯메>신문을 발행할 때였다. 그분은 학교에서 주는 편집비를 나에게 전담 관리케 했다. 어느 하루 인쇄소로 가는 길에 삼각지를 지나는데 마침 국군의 날 시가행진으로 길이 몹시 붐볐고 버스 안도 만원이었다. 인쇄소에 도착하고 보니 안주머니가 면도칼로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편집비 보관 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낭패한 얼굴로 그 얘기를 하자 허 선생님은 각자 주머니 털어 교통비와 밥값을 쓰자고 했던 바,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내가 잘못한 일로 매우 부끄럽다. 그 돈을 소매치기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실수로 아무 말 없이 내 돈을 편집비로 내놔야 옳았다.
<다섯메> 교지가 나온 다음에야 함석헌 선생 원고 건을 나동성 교장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그때 나에게 보고했더라도 그 원고는 교지에 실었을 거라고, 만일 두 분 선생님이 경찰에 불려갔다면 내가 대신 갔을 거라고, 참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당국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지까지는 검열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비어 있는 자리그해는 학기 내내 학급 담임에,신문 및 교지 편집지도 교사, 국어 교과 지도교사 등으로 참 바쁘게 보냈다. 여주 신성중학교도 사립이었지만, 오산중학교 역시 사립학교였다. 재정이 빈약한 대한민국의 대부분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오산중학교에서도 매일 아침 직원조회 시간 끄트머리에는 교감선생님이 모눈종이에 그린 학급별 등록금 납부 현황 막대그래프를 쳐들고 학생들의 납부금 등록을 채근했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이라 그렇게 채근하지 않으면 재정이 빈약한 사립학교는 운영이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겠지만 대부분 학급 담임선생님들은 그 점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모두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등록금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 특히 구미중학교(졸업 후 곧 공립으로 전환) 때는 서무과 직원이 아침조회시간 등록금 미납자를 운동장 한 곳으로 불러낸 다음 그대로 집으로 쫓아 보내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해 학년 말까지 70명의 반 학생들은 한 학생 낙오자 없이 잘 이끌고 갔지만 학년말 진급사정회 날 세 학생의 자리가 온종일 비어 있었다. 그들 세 학생은 등록금 미납으로 등교정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밤을 새우다시피 가슴 아파하면서 '우울한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글을 그때 정기 구독했던 <독서신문>에 보냈다. 열흘 후 독서신문에 '비어 있는 자리'라는 제목으로 내 글이 나갔다.
"군복무를 마치고 곧장 교직에 몸담은 지 1년여, 지난 3월 눈동자가 유난히도 초롱초롱한 중학교 신입생들을 학급담임으로 맡았다. 입학 무렵에는 아직 젖내가 가시지 않은 개구쟁이들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의젓한 중학생으로 성장함을 볼 때마다 교육의 보람을 느끼곤 했다. 오늘은 지난 학년도를 마무리하는 진급사정회 날이다. 학년 말까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70면 전원을 이끌고 왔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로 가니 빈자리가 세 곳 생겼다.'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학교에 오지 말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하고 '등교정지'를 당하고도 그동안 계속 출석을 시켰지만 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은 학년 말 진급사정회 날이니 내일까지는 꼭 납부해야 한다'는 말을 얼더듬으면서 전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글썽이며 귀가했다.이렇게 한꺼번에 세 자리가 빈 날은 처음이고, 어제 눈물을 글썽이며 풀이 죽어 돌아가던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온종일 마음이 시큰했다. '가난이 죄'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자신 몸소 체험하기도 했지만 채 피지도 못한 그들에게 그 말을 어떻게 일러줄까? 나도 학창시절 등록금 독촉으로 무척 시달렸는데, 그때 등록금을 독촉하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왜 그토록 매정스럽고 무섭게 보였던가!어제까지 개근했던 세 녀석은 오늘은 등교도 못한 채 어쩌면 세상을, 부모님을, 담임선생을 원망하고 있을 게다. 오늘따라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거추장스럽고, 교단에 선 게 후회스러워 어디 가서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영호, 화영, 현수 - 너희들이 등교하는 날, 내 우울한 마음은 활짝 개이리라." - <독서신문> 1973. 3. 5. 재미 유학생이 보내준 장학금 이 글이 나간 뒤 한 달 남짓한 동안에 5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수녀님, 스님, 유학생, 대학 때 여자친구…. 그 가운데 미국 버클리대학의 유학생 최성찬씨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박도 선생님이 편지를 받고 놀라실 겁니다. 오늘 한국에서 보내준 <독서신문> 3월 5일자 '교사의 발언'란에 실린 선생의 글을 읽고 교사로서 순수한 교육정신과, 또 비참하게 잘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학생들의 정경에 감동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우선 빠른 결론부터 내려서 그 학생들을 어쨌든 구해 주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구체적인 방법과 가능성을 희망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