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고 은사 박철규 선생님의 만년 모습
박도
박철규 선생님은 그새 교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박 선생님은 그간의 내 행적을 물은 뒤 제의했다.
"박군, 아니 박 선생. 모교로 올 생각은 없는가?""네에?!""신학기를 앞두고 교사를 초빙하고 있는 중이야. 이력서를 한 번 내 보시게.""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나는 뛸 듯이 기뻤다.
박철규 선생님,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61년 고교 입학시험장에서다. 첫째 시간 국어 시험이었다. 시험 답안지의 빈칸을 어느 정도 메운 후 나는 감독 교사를 바라보았다.
바로 박 선생님이었다. 훤칠한 체구, 남색 싱글 양복차림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의 윤곽이 굵은 멋쟁이 선생님이었다. 마치 <우정 있는 설복>의 케리쿠퍼 인상으로 내 머릿속에 확 빨려들었다. 물론 그때는 그분의 성함도 전공과목도 몰랐다.
입학 후, 국어 시간에 선생님을 만났다. 그것도 첫 시간이었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그 무렵 고1 국어 교과서 첫 단원은 이하윤 씨의<메모광>이라는 글이었다. 선생님은 그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는 독후감을 발표케 했다.
첫 번째로 내가 지명됐다. 나의 심한 경상도 사투리가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여러 명의 발표자 중 선생님은 유독 나를 칭찬했고, 마치 노래자랑대회에서 최우수로 뽑힌 가수처럼 다시 발표를 시키며 경청해주시고, 내 이름을 제일 먼저 기억해주셨다.
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한테 한문을 약간 배운 탓으로 한자 실력은 동급생보다 조금 자신 있었다. 국어에 한자의 비중은 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그래서 수업시간 선생님에게 돋보일 수 있었다. 1학년 가을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하자, 그 일로 나는 선생님이 맡은 신문과 교지에 편집기자로 뽑혔다. 자연스럽게 교실 밖에서도 선생님과 접촉이 잦았다.
해마다 '학생의 날'이면 당신이 체험한 광주 학생사건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 주셔서 우리들 가슴에 잦아진 민족혼을 일깨워주셨다. 2학년 때 교내 문예 현상모집에<국화꽃 필 때면>이란 내 작품이 소설 부문 당선작으로 뽑히자 선생님은 더욱 나를 아껴주셨다.
"박군은 국문과로 가야 해."선생님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몇몇 분이 국문과는 춥고 배고프다고 법대나 상대를 권했지만 나는 굳이 국문과를 택했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뜻밖에도 공로 표창장을 받았다. 뒷날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졸업사정회 때 박 선생님이 극구 천거했다고 했다.
모교로 가다그 무렵 꿈이었던 모교의 교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다니. 1975년 2월 하순. 교사 부임에 필요한 구비서류를 제출하고 학교를 나오다 숙명여고 교문 앞에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수속 다 끝났어?""네, 방금 제출했습니다.""박 선생!""네, 선생님?""나, 새 학기부터 그만두게 됐네.""네?!"나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넋을 잃었다.
"아무쪼록 열심히 근무해.""선생님! 이럴 수가…."선생님은 더 이상 말씀을 않으시고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부임 수속이 끝나는 날에야 선생님의 이임 소식을 듣다니. 나의 모교 부임이 선생님의 마지막 선물일 줄이야. 선생님은 당신 앞일을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시고 나를 채용하신 것 같다. 왠지 모교에서 지낼 앞날이 불길할 듯한 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오산중학교에서는 이미 사의를 표명한 바가 아닌가. 그래, 부딪혀 보는 거다. 그래서 1975학년도 새 학기부터 모교인 중동고등학교 교단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