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대학의 그래피티유럽의 다른 대학들이 그렇듯이 어디까지가 대학이고 어디까지가 시가지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젊은 학생들이 좀 많아지고, 담벼락 여기저기가 그래피티와 낙서, 대자보로 지저분해지면 거기가 바로 대학 건물인 셈입니다.
박용은
최고(最古)의 대학인만큼 출신 인물들의 면면도 화려합니다. 단테, 페트라르카, 에라스무스, 코페르니쿠스 등 중세를 극복하고 근대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들로부터 최근의 루이지 갈바니, 마르코니와 같은 과학자들 그리고 파시스트 독재자인 무솔리니도 볼로냐 대학 출신입니다.
대학생들의 활기를 여기저기서 느끼다 보니 어느새 '국립 회화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국립 회화관'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어떤 공고문도 붙어 있지 않고 그냥 닫힌 상태입니다. 나 말고도 회화관을 찾은 여러 명의 여행객이 문이 닫힌 사실을 알고는 어리둥절해 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아마 수업을 들으러 온 것 같았는데) 문이 닫힌 회화관 앞에서 환호를 지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나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휴강인가 봅니다.
그나저나 나는 우두망찰했습니다. 볼로냐에서의 일정이 계속 꼬여가기 때문입니다.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부속 박물관도 문이 닫혀 있었고, 시청의 미술관도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아시넬리 탑'에 올라갔다 온 탓에 '국립 회화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그마저도 어긋난 것입니다. 한국에서 예매한 밀라노행 기차는 오후 6시 이후.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볼로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우선 어떻게 될 판인지 상황을 보기 위해 회화관 앞 광장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추워진 날씨 탓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회화관 옆 간이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하나를 시켜 놓고 시간을 보내며 글을 썼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그렇게 있다가 다시 회화관 문 앞에 가 보니 여전히 닫혀있는 문.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대학 건물 아무 곳이나 일단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마침, '파인아트 컬리지'였는데 안내데스크가 있었습니다. 왜 회화관 문을 열지 않느냐고 했더니 오후 2시에 연다고 합니다. '이런, 젠장. 공지라도 붙여 놓지.'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짜증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어질 수 없는 게 여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건 그렇고, 아직 2시간 가까운 시간을 그냥 보내야 합니다. 볼로냐의 다른 곳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대학가에 있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글을 쓰다 책을 읽었습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말입니다. (여행 짐이 너무 많아 읽을 책을 따로 가져가진 않았지만, 태블릿 PC에는 200여 권에 이르는 세계문학 E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장미의 이름>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요? 최소한 열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또 새로운 문장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오늘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
그렇습니다. 한 달이라는 내 생애 첫 여행의 설렘 속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책 읽을 구석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정말 규칙적인 일정을 정말 힘들게 소화하면서도, 그래서 숙소에 오면 발과 허리가 아파 견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내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은 읽을거리였습니다. 그게 다음날 일정의 준비였든 아니면 다른 책이든 말입니다. 에코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찬탄을 금할 수 없었던 나. 오늘 나는 이곳 볼로냐에서 그에게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셈입니다.
<장미의 이름>을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습니다. 서둘러 카페를 나와 '국립 회화관'으로 향합니다.
이탈리아 대부분 미술관이 그렇듯이 전시실의 시작은 중세 미술부터입니다. 밀라노행 기차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품들을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볼로냐 국립 회화관'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볼로냐 화파'의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볼로냐 화파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