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버스 휴게소.
Dustin Burnett
"발 좀 내려주시겠어요?"
스윽. 차장의 응답은 그게 다였다. 스윽, 하고 나를 흘끔 쳐다보고는 끝. 차창 밖을 내다보며 딴청을 피운다. 이것 봐라?
"이봐요, 발 좀 내리라고요. 제 다리에 닿잖아요!"버스가 출발한 지 한 시간. 내 옆에는 다정한 셰르파 아저씨 대신 덩치 큰 차장이 앉아 있었다. 차장은 더스틴이 기껏 양보한 자리에 앉아 있던 셰르파 아저씨를 쫓아내고는, 그 큰 엉덩이를 내 옆으로 들이밀었다. 참자. 참을 인(忍). 참을 인(忍). 참을 인(忍). '참을 인(忍)' 세 글자에 복 대신 차장의 발이 찾아왔다.
두 다리를 얌전히 두지 못하고 덜덜 털어대던 차장은 급기야 왼쪽 발을 들어 올려 오른쪽 다리 아래로 깔았다. 오늘 하루 어디에서 무엇을 얼마나 밟고 다녔을지 알 수 없는 발. 그 두툼한 발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참을 인(忍)' 자 속 칼날(刃)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못 참겠다.
"발이요. 발 닿고 있다고요. 제 다리에, 당신 발이 이렇게 닿고 있다고요."
차장은 대답 대신 얼굴을 찌푸렸다. 더스틴이 끼어들었다. 더스틴은 굵은 눈썹을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차장을 노려봤다. 발 내리라고, 짧고 굵게 말했다. 차장이 발을 내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어디 냄새나는 발을 숙녀(?) 앞에 들이밀어? 근데 뭐야?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남자 말만 말이고 내 말은 발이야?
차장에겐 숙녀고 뭐고 없다. 차장은 50여 명이 탄 이 버스의 최고 권력이었다. 차장이 좌석을 옮기라고 하면 옮기고, 서서 가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했다. 버스 안 최고 권력을 건드린 건 실수였다. 승객들을 지휘하던 차장의 굵은 손가락이 이윽고 나를 가리켰다. 차장은 나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그래. 원하는 바다. 나야말로 네 냄새 나는 발과 겨드랑이 옆에 1초도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오른쪽에 앉은 인도 아저씨와 자리를 바꿨다. 셰르파 아저씨도 차장 옆에 끼어 앉았다. 다행이다. 셰르파 아저씨 자리가 생겨서. 불운의 더스틴만이 좌석 없이 버스 복도에 앉아 말없이 여정을 이어갔다.
버스 안 반동분자, 즉 나와 더스틴의 제거에 성공한 차장이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권력 다툼이 종료된 버스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졌다. 좌석은 여전히 좁고 불편하지만, 폭동의 걱정도 없고, 한없는 기다림도 없는 평온한(?) 버스 여정이다. 나는 컴컴한 버스에 앉아 꾸벅, 꾸벅,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눕고 싶다. 꾸벅, 꾸벅. 기대고 싶다. 꾸벅. 기대자. 음. 흐음. 뭔가 이상한데. 더스틴 어깨는 이렇게 뾰족하지 않은데 말이지…. 푹신한데 말이지…. 어쨌든 기대자…. 뾰족해도 어깨는 어깨야…. 흠냐…. 꾸벅, 꾸벅.
쿵! 버스가 덜컹댔다. 어깨에 귀를 박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뭔 어깨가 이렇게 뾰족해? 고개를 돌렸다. 어깨는 더스틴의 소유가 아니었다. 내 옆에는 동그랗고 푹신한 더스틴 대신, 작고 비쩍 마른 인도 아저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아저씨는 작은 몸을 움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민망해라. 미안해라.
이 보수적인 인도 사회에서, 어디서 굴러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간 여자의 머리를 받힌 채, 얼마나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을까. 내 머리로 말할 것 같으면 포카라 등산 장비점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모자를 찾아 헤매야 하는 무거운 머리통이다. 가여운 아저씨.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무거웠을까.
아참, 더스틴. 바닥에 앉은 더스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 이글이글 타는 눈빛.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너 지금 이 아저씨 질투하는 거야?
질투가 아니라 불편함이다. 버스 바닥에 배낭을 깔고 앉은 것까진 괜찮지만, 이따금 들이닥치는 승객들과 짐 더미에 밟히는 건 참기 힘들었을 테다. 앞뒤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앉은 남자들, 졸다가 고꾸라지는 그 남자들의 기둥이 되어 어깨와 등을 빌려주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다.
지난 사흘간 단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모두가 잠든 가운데 홀로 깨어 어둑한 버스 안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건 민감한 성격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다. 혹시 누가 우리를 건드리지나 않을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어둠을 살피는 것 또한. 아내인 나는 그 무엇하나 헤아리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앉아, 큰 머리통을 세차게 박아가며 옆에 앉은 인도 아저씨나 괴롭히고 있다.
가여운 더스틴. 가여운 아저씨. 더는 아저씨를, 더스틴을 괴롭히지 말자. 다짐하고 고개를 빳빳이 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와 무거운 머리통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아저씨의 뾰족한 어깨에 눌려 골이 아파 일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잠을 깨기 위해 더스틴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버스 문간에는 인도 남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시의 먼지 섞인 바람이 머리에 스쳤다. 잠들지 않아도, 버스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그토록 열망하던 리쉬케쉬에 닿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바람은 어디에서나 불듯, 여행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여행은 목적지인 리쉬케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에는 가지 못한 마헨드라나가르도, 폭동으로 멈춰 선 버스에서의 기다림도, 함께 국경을 넘은 네팔 사람들도, 버스 차장의 발 냄새와 뾰족한 어깨의 인도 아저씨도, 나의 여행 동반자, 예민하고 사려 깊은 더스틴도, 모든 게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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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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