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드레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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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과정에서 많은 감정인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명세서'의 필체가 일치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군법회의는 1894년 12월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그는 국가 반역죄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악마의 섬'으로 유배됐다.
1896년 3월 참모 본부 정보부장으로 새로 오게 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사건을 재조사한다. 그 결과,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이 드레퓌스가 아니고 진범은 귀족 가문 출신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카르는 진실을 밝히려고 군 수뇌부에 보고하지만, 외면 당하고 되레 인사 발령 조치를 당한다.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한 에스테라지는 1897년 조작된 증거가 제출된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재판 직후 영국으로 도피한다.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우고 정작 스파이는 도망가도록 방임한 군 수뇌부의 횡포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 대표적 지식인이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그는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로로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글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일로 에밀 졸라는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에도 비판 여론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군 수뇌부도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피할 수 없었다. 1899년 최고 재판소는 군법회의에서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드레퓌스가 외국 또는 외국 첩보 요원과 내통하고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적대 행위 또는 전쟁을 유발하도록 했거나, 명세서에 언급된 자료들을 넘겨줌으로써 그 방법을 제공했다"는 공소 사실은 유죄로 인정되었다.
드레퓌스는 이번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대신 정부는 열흘 뒤 드레퓌스에게 특별 사면을 내렸다.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결론은 군부의 명예를 살리고 드레퓌스의 처벌을 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다시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그제야 무죄를 선고한다. 그 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군에 복귀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때문에 희생양이 돼야 했고 13년간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 인권에 대한 각성과 지식인의 현실 참여를 고민하게 한 사건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돌아보자. 당시 필적 감정만 제대로 이뤄졌어도 드레퓌스가 반역자로 몰려 처벌받는 불상사는 일어날 수 없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형사 재판에서 왜 엄격한 증거가 필요한지를 방증하고 있다.
필적 감정 때문에 피고인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일은 과거 먼 나라의 이야기이기만 한 걸까. 1991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판결 2]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