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27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실연을 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공소장에는 유서대필의 일시와 장소가 "1991년 4월 27일경부터 같은 해 5월 8일까지 사이의 일자 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라고만 적혀 있었다. 피고인 측은 방어권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유서대필 여부가 쟁점이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심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종종 확신없는 태도를 보였다. <동아일보> (1991년 12월 20일자)에 따르면 재판부는 결심공판이 끝난 뒤에도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초초해했다고 한다. 같은 날 재판장인 노원욱 판사는 "유죄를 선고했을 경우 제3가 나타나 내가 유서를 썼다고 양심선언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를 표했다(<한겨레> 12월 21일자 보도).
재판부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 이해해달라" 이러한 태도는 판결 선고에서도 이어졌다.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번 판결이 객관적으로 절대적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증거로 볼 때 피고인이 유서를 대신 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대필사실이 인정되는 이상 엄벌에 처해 마땅하지만 유서대필 경위가 적극적이었는지 여부가 불분명해 양형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재판부의 소신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한편으론 무죄에 따른 파장도 무시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1991년 당시 <경향신문>도 재판결과에 대해 "1심 재판부의 이번 유죄선고는 재판부의 절대적인 신념이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무죄가 선고됐을 경우 사회전반에 미칠 엄청난 파문과 부작용을 고려한 '차선의 선택'으로 보여진다"고 분석했다.
2심 판결(서울고법 재판장 임대화)과 대법원 판결도 1심과 별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1992년 7월 24일 상고기각 판결로 유죄를 최종 확정한다. 재판은 전적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201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승격)의 감정결과에 기댄 판결이었다.
필적감정, 오류 가능성은 없나?필적감정은 지문이나 혈흔, DNA 감정과 같은 수준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 눈으로 식별하는 감정의 특성상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강기훈 사건 당시 형사사건의 필적감정은 국과수가 도맡아했고 법원은 결과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한 해 수천 건의 감정결과가 국과수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피고인의 운명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1991년 5차례에 걸친 유서필적감정은 명의만 국과수였을 뿐 사실은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가 거의 전적으로 진행했다.
김씨는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필적감정의 경우 감정목적물과 대조자료의 각 글자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유사비율이 70% 이상이면 동일 필적, 45% 이하이면 상이 필적이 원칙"이고 "강기훈씨 필적이 몇 % 이상 유사한지 구체적 수치자료는 없다"고 진술했다.
자살방조의 유일한 증거를 만들어 낸 전문가의 진술치고는 다소 허술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사비율'의 판단은 전문성이나 개인적인 능력, 주관에 따라 좌우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정결과를 맹신하는 일은 위험하다. 이런 한계 때문에 유서필적 감정결과도 1991년 1심에서부터 2013년 재심 때까지 감정기관과 문서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국과수 필적 감정인 구속에 법원은 "유서대필사건과는 별개"필적감정 자체가 갖는 한계를 감안하면 법원은 감정 결과를 신뢰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 외 다른 보강증거도 살펴야 했다. 그것으로 부족하면 여러 군데서 감정을 받아 오류가능성을 줄이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강기훈의 변호인단은 1991년 일본의 오니오 요시오라는 감정인을 통해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결과를 제출했지만, 법원은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신원불상의 재일교포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한 것으로 "감정인으로서 기본능력과 감정의 기본조건을 결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뿐 아니다. 감정인이 외부에 영향을 받아 감정결과가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2심 재판 도중인 1992년 2월, 국과수 직원이 돈을 받고 허위감정을 했다는 사설감정인들의 폭로가 나왔는데 김형영씨도 뇌물수수 혐의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김씨는 1998년에도 토지문서를 허위감정해준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법원이 '한국 필적감정의 최고 권위자'라고 추켜세운 김씨가 구속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2심 재판부(재판장 임대화)는 "김형영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그의 감정에 의심이 있을 수 있으나 유서 대필사건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김씨의 필적감정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필적감정기관의 신뢰가 흔들렸지만 법원의 유죄판결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유서대필이 곧바로 범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검사의 주장대로 유서대필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곧바로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자살방조로 보아야 하는가. 대법원은 "정신적 방법에 의한 방조"라고 해석했지만 일부 학자는 유서대필을 했더라도 살인과 유서대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죄가 성립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6년 진실화해위 "국가 사과와 재심 권고"사건은 의혹 속에 이대로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2006년 진실을 밝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강기훈 유서대필의혹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의결하였고, 필적 재감정결과와 관련자 증언 등 1년여의 조사를 벌인다.
진실화해위는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 김기설씨의 필적인 담긴 자료를 새로 발견하고 감정대상에 추가한다. 위원회는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와는 별도로, 2006~2007년 7곳의 사설감정기관에 감정을 의뢰하고 2007년에는 국과수로부터 다시 한 번 감정결과를 통보받는다. 감정 결과는 1991년과 딴판이었다. 특히 국과수는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감정했던 1991년과 달리, 2007년 재감정에서는 유서가 고인의 필적임을 인정했다. (자세한 사항은 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