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부정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부조고개'는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문희일
강화도로 온 고려의 옛 신하들과 그들을 따르는 천여 명의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강화를 핍박하지는 않았을까. 자신들을 거부하고 옛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좋게 봐줬을 리가 있겠는가. 고려의 흔적들 역시 방치를 하고 훼손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를 나타내는 유적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천몇 백 년 전의 시대인 신라의 유물과 유적들은 많이 남아있는데 신라보다 더 후대인 고려의 유적들은 왜 남아 있는 게 얼마 없는 것일까. 고려 궁지를 거닐면서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고려는 분명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님인데 우리는 고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신라의 유물과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고려는 대범하고 호탕한 나라였음이 분명하다. 옛 왕조를 존중해준 그 점만 봐도 고려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고려 자신은 이렇게 후대에까지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고려는 자주적인 나라였다 우리 민족이 살아가는 터전인 한반도를 가리키는 '코리아'라는 단어는 '고려'에서 연유했다. 그것은 유럽의 무대에 우리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 바로 고려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는 안정된 경제력과 국방력을 바탕으로 국제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고려 상인은 바다와 육지를 통해 세계를 누볐으며, 송나라와 금나라 또 일본과 아리비아 상인들까지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이처럼 고려는 문호를 활짝 열어 세계를 받아들인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자기중심을 잘 유지하여 우리 것을 잃지 않았던 나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