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바다를 메워 만든 너른 들에서 맛좋은 '강화섬쌀'이 생산됩니다.
문희일
어른들의 염려와는 다르게 우리는 강화도가 아이들을 키우며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이나 인천과도 그리 멀지 않으니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빠를 것이고, 더구나 자연이 오롯이 살아있는 곳이니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질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우리 당대만 생각한 게 아니라 후대까지 내다보고 강화도로 이사를 왔으니…. 우리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주변의 걱정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일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살기 좋은 곳을 택하는 데 있어 풍수학적인 지리(地理)와 생리(生理) 조건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 즉, 넓은 들이 있어서 먹고살 걱정이 없는 곳이 살기에 첫째로 좋은 곳이고, 또 물길을 이용해서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기에 좋은 곳이 그다음이라는 말일 게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강화도만큼 살기 좋은 곳이 또 있을까.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바다를 메워 만든 들은 매우 넓다. 가구당 경작하는 토지 역시 넓다. 그래서 "한 해 농사지으면 10년은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질 정도로 강화는 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또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한데 모여 바다로 흐르는 곳이므로 어족이 풍부해 바다 농사도 잘된다. 그러니 <택리지> 식으로 보자면 먹을 게 많이 나오는 강화는 살기에 좋은 곳임이 분명하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육로를 통해서 물자를 운반하기에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수로를 이용해 세곡이며 물자들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갔다. 강화도 인근은 수로 교통의 요지이자 수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니, 강화 해협은 지금으로 보면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예성강과 그 앞바다를 기반으로 한 왕건이 세운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 인근 해역은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더구나 강화와 개경은 거리도 가까웠다. 두 지점간의 지표거리가 약 28km에 불과하니 리(里) 수로 따지자면 70여 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다. 서울에서 수원까지가 40km 정도라고 하니 강화에서 개경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개경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살기에도 좋은 곳이니 위기 상황이 닥치자 고려 조정은 강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침략해오자 강화로 수도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