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인민정부 청사 담
박도
나는 그 건물을 바라보며, 솔직히 이 점이 바로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게 강점당하여 신음하였던 원인의 하나였다고 진단했다.
나는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솔직히 일본을 인정하고, 배울 건 배우고 그들의 침략성은 규탄해야 우리가 그들을 이기거나 대등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창춘과 다롄(대련)에서도 일제가 남긴 숱한 건물들을 봤는데 아직도 말짱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도 남아있는 서울 역 건물이나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로 허물어버린 중앙청 건물(옛 조선총독부)들은 숱한 세월이 흘러도 튼튼했다.
일본 후쿠오카 박물관에 가 봤더니, 고대 일본은 한반도에서 농사와 농기구, 청동기 등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그 유물과 사실들을 기록 보존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국립박물관의 가장 으뜸 소장품은 우리나라 고려청자다.
그렇다면 이런 우수한 솜씨를 가진 우리나라가 어쩌다 졸속과 저질, 부실의 극치를 이루었을까? 그것은 해방 후 정통성이 없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임기 내 우선 가시적인 업적을 보여주기 위해 졸속의 극치를 이룬 결과다. 한 예를 들면 임기 내 주택 200만 호 건설이라든지, 임기 내 4대강 사업 완료, 숭례문 건설 등이다.
그것도 규정대로 자재를 쓰고 공기에 맞게 시공 건설했다면 다소의 부실은 막을 수 있으련만 우선 공사대금에서 정치헌금, 비자금 등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공사대금이 줄어들고,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여 공사현장에서는 50퍼센트 정도의 공사비를 쓰기에 날림공사 부실공사를 면치 못하여 공사 때부터 대형 사고를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