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향 호남의 뿌리인 광주 포충사
박도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나라가 이웃 나라인 일본에게 침략당한 것은 이미 400여 년 전, 1592년 임진왜란 때였다. 그 이전 우리는 일본을 '왜(倭)' '왜국(倭國)' '왜구(倭寇)' 등으로 몹시 깔보고 업신여기며, 지난 날 우리 문화를 그들에게 전수해준 우월감에 젖어 살았다. 그런 새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입수한 무기(조총)를 도입해 대륙 정벌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기미를 감지하고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쳐들어온 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내주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관군이 일본군에게 패해 곧 평양까지 점령당하자, 선조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하려고 했다. 이때 유성룡이 이를 만류했다.
"전하께서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이며, 후일 백성들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남아 있고, 머지않아 호남 지방에 충의의 선비들이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가십니까?"신하의 충간에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던 몽진 행렬을 멈췄지만, 전란에 죽어가는 백성들의 안위보다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못난 임금이었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꼭 358년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게 내주게 됐다. 그러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새벽 열차를 타고 남으로 도망친 뒤 거짓 방송을 했다.
"우리 국군은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선조 임금은 말을 타고 도망친 데에 견주어, 시대가 바뀌어 이승만 대통령은 기차를 타고 도망한 점이 다를 뿐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국전쟁 때나 도성(서울)에 남아 적 치하 죽을 고생은 한 사람은 대부분 일반 백성이었다.
의로운 선비임진왜란은 당시 조선 인구 500여만 명 가운데 약 300여만 명이 희생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다. 왜군의 총칼에, 역질에, 난리 중 먹을 게 없어 굶어죽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이때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고, 왜군을 패주케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 승병(僧兵)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