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조금 흔들렸지만 그때의 차가운 공기까지 생생히 기억나게 한다.
김산슬
허무하게도 버스는 3분쯤 달리더니 마치 치열한 경매가 끝나고 처참해진 청과물 시장처럼 보이는 장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비와 뙤약볕만 피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한 청과물 시장의 지붕 위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Arrival(도착)'이라고 적혀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래, 여기가 이제 이집트란 말이지. 시작부터 너무 이집트스럽잖아!!!' 옆을 보니 이보가 웃고 있었다. 그도 아마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요르단에서 첫 개강 날 학교에서 만나게 된 우리는 순식간에 국적과 나이를 떠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단짝이 되었다. 심지어 우리는 각자 찍은 사진조차 피사체와 구도까지 똑같았다. 말하자면, 생각이 같고 바라보는 곳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생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한 이보는 나와 가장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지난 수십 년을 살아온 두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슷했던 우리가 또 다른 제3의 장소에서 만나 가까워질 수 있는 확률. 나는 이것을 인연이라 믿었고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의 인생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도 좋아했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를 여행을 함께 하기에 가장 좋은 친구였다.
그 옆에 나흘라는 잔뜩 긴장한 얼굴과 진흙 범벅의 바닥을 살피며 조심히 발을 딛고 있었다.
대만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국립대에서 아랍어를 전공하는 나흘라 또한 요르단에서 만난 똑똑한 친구였다. 똑 부러지는 성격에 드라마를 보며 배웠다는 유창한 영어, 해박한 지식과 유쾌함이 그녀의 매력이었다.
요르단에서 처음 이사하던 날 집에 나타난 검지손가락 크기의 바퀴벌레를 보고선 혼비백산 비명을 지르던 세 명의 한국인 아가씨들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나 터프하게 슬리퍼를 벗어 도망가는 바퀴를 때려잡아준 세심함과 친절함도 갖춘 그녀는 내가 이사한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같은 아시아권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자란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거나 하면서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남자인 이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민들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언제 두고 갔는지도 모르게 정성 어린 편지로 마음을 다독여주는 속 깊은 친구였다. 그렇게 정 많고 세심하게 남을 보살펴주는 그녀를 우리는 Granny(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언제나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들만 여행했던 이보와 '이런 식'의 배낭여행은 처음인 나흘라.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예약한 숙소에 묵는 여행을 주로 해왔던 나흘라에겐 사실 페리를 통한 이동부터가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처음 계획을 짤 때 그녀는 우리를 위해 편한 비행기를 포기했다. 그저 우리의 말을 믿어주고 함께 여행에 동참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사실 불편한 좌석과 탁한 공기,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던 10시간은 나흘라뿐 아니라 베테랑 여행자인 이보조차 지치게 했다. 내리고 보니 항구 또한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으니 나는 자연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나흘라가 이집트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전에 질려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흘라가 우리와 이집트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구 할이 나의 이집트 예찬 때문이었기에 내 마음엔 상당한 책임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주일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보와 눈이 마주친다. 그래, 우리는 또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나지막이 그가 웃으며 내게 속삭인다.
"We could survive somehow, we will see Sophie. In sha alla." (우리 잘 살아남을 거야. 지켜보자 소피, 인샤알라.(신의 뜻이라면)")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낯선 상황에 무기력하게 던져지고,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낸다. 여행도 인생도 계획할 수는 있되 마냥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며 우리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
선진화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거닐어도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우리가 아무리 몸을 사려도 터질 일은 결국 터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면 되는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이집트를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언제나 혼자서만 여행했던 이보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나흘라는 첫 배낭여행을 통해 나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한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꽤 만족스러웠던' 3인조 여행의 추억을 얻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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